요한복음 강해 77. 십자가로 다 이루심
요한복음 19:17-30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오늘 본문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네가지의 모습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면과 함께 빌라도가 죄패를 기록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구형받으신 후 군인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은 그 잔혹한 베르베라티오(‘베르베라티오’는 죄수의 옷을 벗기고 기둥이나 말뚝에 묶은 뒤 여러명의 고문자들이 죄수의 살점이 갈가리 찢겨 피를 흘릴 때까지 계속 때리는 고문입니다. 이때 사용된 채찍의 끝은 못이나 뼈조각 또는 사슬 모양의 납조각이 연결되었는데 여기에 맞게 되면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를 진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채찍질로 인해 기력이 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잔혹한 채찍질이 가해졌고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이제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예수에게 지웠습니다. 세로 기둥은 처형 장소에 이미 준비되어있습니다. 다른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지고 갈 기력조차 없으셨기에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 사람 시몬에 이 십자가를 잠시 지게끔 했다고 기록합니다. 이제 언덕배기의 처형 장소에 도착하고 예수는 눕혀져 두 손과 발에 못이 박힙니다.
십지가 형은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처형방법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처형방법입니다. 사람이 매달리게 되면 흉부가 막혀 숨을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숨을 쉬기 위해 온몸과 근육에 힘을 주어 몸을 올리게 되는데 이것을 반복하다가 죽는 순간까지 육신의 고통을 받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이러한 처형방법이 너무나 잔혹했기에 로마인들에게 구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패에는 다음과 같이 쓰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것이 히브리어,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로 각각 쓰여졌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에 명절을 지키러 올라온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가 처형이유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죄패를 지켜보던 대제사장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쓸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경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봐라 너희 왕이 이렇게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좌우편에는 강도둘이 함께 달렸습니다. 그들은 바라바와 함께 테러를 모의한 자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죽인 강도들과 함께 죄인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조롱하듯 유품을 나누고 있는 군인들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극한의 고통을 겪고 계실 때 그 아래에선 군인들이 예수의 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당시 옷은 상당히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는 속옷도 나누고자 했으나 통으로 짠 것이기에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취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자 앞에서 그렇게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세 번째로 성경은 이제 예수의 곁에 있는 여인들과 제자의 모습을 비춥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그곳에 있습니다.
여기 성경번역상의 오류가 있는데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동일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제자 중 유일하게 이글을 쓴 요한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27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죽기 전까지 인간적 도리를 다하십니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비록 육신의 어머니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계심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오래 산 인물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쓸 때 그의 나이는 80을 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게서 형제와 자매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찾을 때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내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막3:35).
마지막으로 성경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에 주목합니다.
그 분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군인들은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찍어다 예수의 입에 가져갔습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성경이 주목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일반적으로 볼 때 이것은 좀 어색한 문장입니다. “군인들이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게하고”라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능동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예수님의 순종의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 성경은 예수님의 죄패에 주목합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것으로 인해 대제사장과 빌라도 간의 언쟁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분명 유대인들을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리고 명절에 여러 각처에서 올라온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된 유월절의 분위기 속에서 다윗왕 때의 태형성대를 기대하며 소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죄패를 보면서 상당히 불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이 죄패는 진정한 유대인의 왕을 나타내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온 인류와 모든 피조물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죄패를 기록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이 보여주었던 행동을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중요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24절,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시편 22편을 14절부터 보시면,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의 죽음 가운데 일어났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마신 것도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 하신 행동이었습니다.
28절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것은 시편 69편 21절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를 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준비되어지고 실행되어졌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완벽하게 그 뜻을 다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성취된 몇 가지 중요한 사건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로 창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는 표현 속에서 창세기 22장의 이삭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이상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삼일 길을 걸어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죽여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순종합니다.
이삭은 자신이 태워죽을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산을 오릅니다.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번제물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나무를 쌓습니다. 그리고 번제단 위에 이삭을 올려놓습니다. 이삭은 아무 말 없이 순종합니다.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 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입니다. “네가 내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줄 아노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둘러보니까 수풀에 숫양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삭과 함께 숫양을 잡아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었다가 아닙니다. 앞으로 어느날 준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이 어디입니까?
다윗은 모리아산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합니다. 요19장 20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바로 모리아산에서 예수께서 죽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신 어린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아들을 죽이는 충격적 사건을 통해,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은 4천 년 전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 무엇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압제아래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의 자신을 예배하는 백성삼기 위해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이때 열가지 재앙을 애굽땅에 내리십니다. 마지막 재앙이 애굽땅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방식이 얼마나 믿어지십니까?
온 애굽땅에 하나님의 재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인간 편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미련한 방식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양을 잡는 그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보여주었던 유월절, 죄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바로 십자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완전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어서 우리가 그 피를 힘입게 되면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해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수기 21장의 불뱀사건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등장했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종교지도자였던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설명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3:14)
민수기 21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이 험하고 먹을 음식과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 물려 죽게 하십니다. 죽어가던 백성들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뱀이 떠나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들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미련한 방법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어지십니까?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고, 헌신도 하고, 매일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천번이상의 절을 하고, 이런 것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물린 그 저주스러운 뱀을 모형으로 만들어 들고 그것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쳐다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길은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미련한 구원의 길입니까?
하나님이신 독생자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의 모든 죄를 다 짋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면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미련합니다. 무슨 구원의 방식이 이런 것입니까?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십지가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고전 1:18, 22-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것밖에는 우리의 구원이 없습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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