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62. 평안을 주노라
요한복음 14:27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오늘 우리가 26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서 살펴보길 원합니다.
성경주석가인 메튜헨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유언을 남기셨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유언을 남기셨다. 자신의 영혼은 성부께 맡기시고 자신의 몸은 아리마데 요셉에게 맡기시고 자신의 어머니는 사도요한에게 맡기셨고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평화를 남겨놓으셨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의 원어적 의미는 ‘남겨놓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놓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위대한 영적 유산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삶은 문제의 연속이었습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 속에서 우리의 삶은 그리 평안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들을 접하면 우리는 불안합니다.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실제적인 현실인 죽음을 생각하면 무겁고 불안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분주하게 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바쁘고 분주했던 일을 뒤로하고 홀로 있을 때면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가 있습니다.
불안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삶을 위축시킵니다.
뉴질랜드에 처음 갔을 때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 무작정 뛰어들었습니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던 터라 깊이가 있는 바다에서 잠수를 즐겼습니다.
형용색색의 물고기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 물속에서 “깍”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렇게 잠수를 즐기다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덮이면서 바다속이 일시적으로 깜깜해 졌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상어가 나타나면 어떻하지’ 라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깜깜한 바다 속에서 순식간에 나타나 삼켜버리는 영화 속 조스를 떠올리며 순간 불안이 엄습해 왔습니다. 물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불안함과 조급함에 심장이 박동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물속에서 자연스러웠던 몸놀림이 꼬이고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헉헉 거리며 겨우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죽을 뻔 했다!” 수영실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불안함이 조급하게 만들고 몸을 위축시켰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에 자신감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불안은 삶을 조급하게 만들고 위축시킵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단과 결정으로 삶을 소모시킬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명상이나 심리요법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체면에 빠져 신비적인 만족감을 얻습니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평안입니다.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들면서 삶에 문제로부터 잠시 잊어버리기도 하고 여행을 하면서 문제로부터 잠시 벗어나 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삶의 근본적인 불안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얻은 평안은 비현실적이고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평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27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일시적, 비현실적, 피상적 평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평안입니다. 이것을 유산으로 너희에게 남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로 나가시면서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그 끔찍한 저주를 앞두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놓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평안은 어떠한 평안입니까?
엄청난 두려움의 현실인 십자가를 앞두고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누군가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그의 마음속은 어떠할까요? 두렵고 떨리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 죽음이 육신적으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하며, 또한 영적으로는 하나님으로 저주 받는 자리에 서게 되는 죽음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이 이제 예수님께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은 평안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절대 평안,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뛰어 넘는 그 절대평안을 주님을 소유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남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러니까 이 평안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어떠한 두려움의 현실 앞에서도 흔들리거나 위축될 수 없는 평안입니다.
이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남겨주신 이 평안은 우리에게 어떻게 누려질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평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평안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깨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뿌리인 원죄입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그 어떤 것으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58: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예레미야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때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의 백성들의 상처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죄의 문제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괜찮다고 하면서 평강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시키고 부인하고 또는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면서 평강하다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우리에게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에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무시고 평강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의 왕이 되셔서 의와 공의로 통치하시면서 평강을 주시는 분이 바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평강의 왕임을 믿을 때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짐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요 그리스도로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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