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66. 성령의 위로와 심판
요한복음 16:5-11
5.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위로
요한복음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지금 근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고 또 이후에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에 그 근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심은 예수님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육신적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심판받는 영적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실족하거나 근심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16장 1절을 보시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은 행여나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실족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또 16:6절을 보시면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도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들을 두고 멀리 떠나는 부모의 심정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다독이고 계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실족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인격적인 사랑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로하고 다독이시는 부성적이며 모성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3: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서도 행여 실족하거나 근심하게 될 제자들이 마음에 밟혔던 것입니다.
이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세상 속에서 조롱과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16:2절에서 출교를 당할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의 두려움은 더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도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만일 그 자리에 있던 제자 중 한 사람이 나라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 저라면 굉장히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다시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로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위로가 될 것입니다. 비록 당시 제자들에게는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승천하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한 성령님을 기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순날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보여준 제자들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담대해 졌습니다. 모진 고문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제자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또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원형경기장의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기도 하며 사지가 찢겨져 죽어가면서 담대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성령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과 60-70년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천왕에게 절한번 하는 것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성도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한국전쟁당시에는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로 공산당에 의해 수많은 성도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가끔 저는 내가 과연 그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솔직히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실 것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함과 평안함을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그것은 나이가 많던 적던 상관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삶에 너무나 분명한 현실입니다. 죽음의 순간이 우리 삶에 어느 때에 어떻게 닥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담대함과 평강을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쌓아둔 재물이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이겠습니까?
제작년 6월에 있었던 메르스 사태를 기억할 것입니다. 메르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병실에서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위로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 시간 요양원에 계신 박집사님 그리고 장인어른을 떠올려 봅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 다는 것입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빛을 바랄 것입니다.
2.심판
다음으로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보혜사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시는 3가지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면 성령께서 행하실 세 가지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말씀은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맥락에서 말씀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자체도 자체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의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책망”이라는 “깨닫게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어집니다. 그러나 원어의 뜻은 책망이지 깨닫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성령께서 죄를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9절에 보니까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심으로 책망의 이유를 말씀합니다.
보혜사께서는 단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책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어줍니다.
이러한 책망이 있을 때만이 우리가 더욱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초가 되었던 하디의
<하디는 토론토 의과대학 교수였던 애비슨(O. A. Avison)의 영향을 받아 졸업후 동 대학의 YMCA 회원들에 의해 8년간의 지원을 약속받고 1890년 9월 30일에 내한한 의료선교사였다. 처음에는 게일과 함께 부산에서 사역하였지만 1892년 11월 동역자 게일과 함께 원산으로 이동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1901년부터 원산과 강원도 통천에서 3년간 의료 및 개척선교를 펼쳤지만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패배감과 번민에 사로잡혔다. "영적인 능력이 결핍"된 자신을 돌아보며 낙심중에 있을 때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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