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2016.4.10
요한복음 1:14-18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강해 네 번째 시간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1.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거나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 존재는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이며 그것은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가 됩니다.
예를 들어 봉황이라는 새가 있습니다.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다.
이 새의 모습은 앞부분은 기린, 뒷부분은 사슴,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등은 거북, 턱은 제비, 부리는 닭을 닮았다고 한다. 오색의 깃털을 지니고, 울음소리는 5음(音)으로 된 묘한 음색을 내며, 뭇새의 왕으로서 귀하게 여기는 환상적인 영조(靈鳥)입니다.
이러한 새는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없는 새를 인간의 상상력을 사용하여 만든 것입니다. 예를들어 서양 사람들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유니콘도 마찬가이죠. 머리에 뿔이 달린 말입니다. 현실세계에는 없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그런데 봉황이나 유니콘이나 결국 보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동물들을 결합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떤 존재를 생각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내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에 대하여는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설명하거나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말이나 글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는 대학원때 조교를 하면서 학생들의 레포트를 많이 읽어보았는데 실제로 학생들의 글을 읽어 보면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십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또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분을 절대자라고도 합니다. 절대자(絶對者)라는 것은 끊을‘절(絶)’ 상대‘대(對)’자를 써서 상대가 끊어진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대적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너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남자다. 나는 목사다. 나는 남편이다.” 라는 내 존재에 대한 모든 설명은 상대적입니다. 그렇죠. 남자라는 것은 여자라는 것의 상대이고, 목사라는 것은 다른 직업과의 상대이며, 남편이라는 것은 미혼이라는 것과 상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무언가와 상대하여 표현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어떤 말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은 다 헛수고이며, 또한 그분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도 다 헛수고인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봉황이나 유니콘을 만들어 설명하는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파편적 지식을 모아 하나님이라는 존재로 만들어낸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이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절대로 창조주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창조주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도 피조물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내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결코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간혹 어떤 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고, 인류 역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2.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으로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인류역사 가운데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모세를 통해서 였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을 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항상 어떤 자연적 현상을 통하여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구약에서는 대부분 구름이나 불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모세에게는 불붙는 떨기나무로 임재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당시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것을 명하십니다.
그 이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는 바로왕에게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한 힘과 권세가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방민족들이 섬겼던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신들 가운데 또 하나의 좀더 위대한 신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자연만물을 다스리고 자신의 뜻대로 태양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한 민족을 택하사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질서와 조화롭게 창조하셨기에 우리 인간에게도 원하시는 질서와 조화로운 삶이 있는데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율법을 인간의 언어로 모세에게 주시면서 그 율법 안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나타내셨고,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공부하고 행하면서 그 하나님을 점점 더 이해하고 알아가며 따라서 결국 참된 경배를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 가족이 함께 외출을 할 때 아이를 반드시 차 뒤에 있는 카시트에 눕힙니다. 아이가 싫어하고 어떤 때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칭얼대고 웁니다. 어떤 때는 너무 안타까워서 아내에게 안아주라고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희 가족이 세운 법입니다. 저희가 세운 이 원칙 또는 법속에는 아이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타면 아이가 잠시 편할 수도 있고, 또 아이가 칭얼대지 않기에 모두가 편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이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모르지요. 왜 카시트에 타야하는지.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고 생각이 성숙하면서 이 법속에 담겨있는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갔던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사랑과 공의, 긍휼과 자비...이러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즉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모세의 율법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과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요3:14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은, 민수기 21장에 놋뱀사건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원망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뱀을 보내 물게 하시고 그들이 독이 퍼저 죽어갈때에 하나님께서 살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는데 그것이 놋뱀을 장대에 만들어 들게 하고 그것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여주셨고, 또한 그러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모세의 놋뱀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이에 안식일에 이런일을 행했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46절에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너희가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법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일에 병 고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시면서 35절에,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나타내셨던 하나님이 이제 자신을 통하여 나타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우리가 알 수 있다고 했고, 그것은 모세의 율법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내셨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반드시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만 상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 “하나님을 아는 것” “예배” 이러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의 기저에는 인격적 만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식적 이해의 차원의 아니라 인격적 만남속에서의 신뢰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배라는 것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절대자에게 종교적 의식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함께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때로는 그분의 백성이 다른 길로 갈 때 안타까워 하시고,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인격적 하나님이 단지 상징적인 임재와 율법의 조항들, 그리고 때로 선지자들의 말을 통해서만 그분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적 만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신 것입니다. 초월주이신 분이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물질세계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절대자이셔서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분이, 보여지고 이해되어지는 방식으로 이 땅 가운데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 즉 로고스께서 육신, 여기서 육신은 죄의 몸으로서의 육신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육신은 보통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하나가, 죄의 몸으로서의 육신이고 또 하나가 피조물로서의 육신입니다. 예수님께서 피조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여기서 “거하다”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성막을 치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임하실 때 성막가운데 임재하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구름이나 불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임재 하셨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모세가 지성소에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그곳에 거대한 구름이 둘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시죠? 그것은 손오공처럼 구름타고 둥둥떠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가운데 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임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면, 요한이 마지막날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마지막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막을 통해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2천년전 이 땅 가운데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모든 말씀과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피조물인 우리에게 말씀,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의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인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NASV)에는 나타내셨다는 것을. “He has explained Him.” 하나님을 “설명했다. 나타내 보이셨다” 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피조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오신 것은 아담의 타락전의 몸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을때는 타락한 인류의 육신, 즉 피곤하고 병들고 썩어지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을 아시는 것입니다.
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봅니다. 2천년에 팔레스타인 땅에 오셨던 예수, 그가 3년동안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들이 바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만져주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주무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또 요한복음 12:44-45에는
“44.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본질이 무엇인가? 그 본질의 나타남이 바로 영광인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사랑, 의로우심, 자비로우심, 긍휼하심, 전능하심...등등 이러한 모든 것을 다 합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전부 관념적이고 추상적입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드렸을 때 잘 와닿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었던 하나님의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영광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이 무엇이가? 그것은 은혜와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신가를 보게 됩니다. 성육신 자체가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되 인간이 되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찾아오심이 은혜입니다. 죄인을 벌하심이 마땅하나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위에 은혜라는 것은 은혜 다음에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계속되는 은혜, 끝없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단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였지만 이 은혜를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또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당시 헬라철학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에게 진리란 구원이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아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은혜와 진리는 결국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 그리고 다함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 그분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영원히 찬양하고 예배해야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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