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5. 세례요한의 첫 번째 증언/2016.4.17.
요한복음 1:19-28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요한복음 강해 5번째 시간으로 세례요한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요한복음의 서론(프롤로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19절부터는 1장 마지막절인 51절까지 증언들이 등장합니다. 이 부분은 3일간에 걸쳐 일어나는 세례요한의 증언과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자들의 증언, 그리고 예수 스스로의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증언들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당시에 어떤 것이 사실임을 나타낼 때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요한복음은 사도요한이 20장 31절에서 밝히듯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도 이런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마태, 마가, 누가가 쓴 증언들이 필요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먼저 당시의 가장 유력했던 인물을 소환합니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왜 세례요한의 증언이 중요할까요?
세례요한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던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고, 그가 선포했던 회개의 선포와 세례를 통한 죄사함의 의식은 하나의 운동처럼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세례요한의 탄생기사는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두 개의 편지를 쓰지 않습니까? 그 첫 번째 편지가 누가복음이고 두 번째가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세례요한의 탄생이야기부터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 이 땅에 살았던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것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꿈이나 환성 그리고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당시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직접 듣고 선포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마침내 오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역할 때문에 그의 탄생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진행됩니다. 눅가복음 1장에 보면,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던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나죠. 그리고 네게 아들을 주겠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후 사가랴는 말을 못하게 되고 후에 아기가 태어나 이름을 지을 때 서판에 요한이라고 쓸 때에 입이 풀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족지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엘리사벳을 찾아가는데 그때 엘리사벳은 요한을 임신한지 6개월 되었을 때입니다. 마리아가 문을 엘리사벳을 만나 문안인사를 할 때 요한이 그 어머니뱃속에서 뛰놀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하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한과 예수님은 어머니쪽으로 친족지간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만난 적이 없는 듯 보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요한이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일찍이 광야로 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은 태어나면서 부터 나실인으로 자랍니다. 나실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자로, 포도나무에서 나는 소산물을 먹을 수 없고 시체를 가까이 할 수 없고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나실인으로 지내다가 언제 광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자신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난 예수, 이종사촌 동생을 만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광야로 들어가는데 이 광야는 사막과는 다릅니다.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황막한 땅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거기서 낙타털로 옷을 만들어 입고, 음식으로는 메뚜기와 꿀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볼 때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외쳤던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4절에 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에 보면 그가 선포한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선지자로서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곧 하나님의 통치, 그분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선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인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고 그 나라가 시작될 것을 선포한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들에게는 물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당시 세례는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유대인이 될 때 행하던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을 회개의 표시로 삼았던 것입니다.
당시 요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였는가 하면,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곳으로 옵니다. 그들은 종교적 열심히 대단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로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그들의 죄를 강하게 지적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하죠.
뿐만 아니라, 당시 헤롯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는, 권력자로서 부정한 일을 하죠. 요한이 이것에 대하여 지적하고 나서니까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헤롯이 요한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민중들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추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에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멋지게 춤을 춥니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하니까, 그의 어머니가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라고 시킵니다. 그 결과 세례요한이 참수당하게 되죠.
그러니까 당시 세례요한은 헤롯왕, 즉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고 담대하게 증거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청빈한 삶의 그가 선포한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은 좋은데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말씀이 힘이 없죠. 그런데 세례요한은 말씀과 삶이 일치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혹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산헤드린에서 사람들을 보냅니다. 산헤드린은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대제사장이 의장이고 공회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백성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70명을 정수로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문제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의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정책 의결 기구였습니다. 그들이 요한을 찾아와 묻습니다. 19절에 보니까? “네가 누구냐”묻습니다. 이때 요한이 예수에 대하여 첫 번째로 증언합니다. 먼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러면 “엘리아냐”라고 묻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신도들과 대결한 일을 아마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인 4장 5-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그 엘리야가 다시 내려온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했던 사역, 즉 책망하고 교육하고 경고하고 예언하는 사역을 할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요한이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소개한 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자신이 그러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들어간 것이나 약대털옷을 입은 것도 엘리야를 연상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또 그가 태어날때에도 천사가 아버지 사가랴에게 임하여 말라기 4장 5절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바로 요한이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1:14절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그 엘리야로 세례요한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기에 다시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 엘리야가 다시 내려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묻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그 선지자냐?” 21절입니다. 여기보면 ‘선지자’라는 단어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붙습니다. ‘그 선지자’라는 것은 신명기 18장 15절에 근거해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당시의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그래서 제2의 출애굽을 이끌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구원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좀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산헤드린 공회에 돌아가 말해야 하는데 세례요한은 간단하고도 단호하게 ‘NO’라고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도대체 당신이 누구인지 좀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말합니다.
23절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부르짖는 목소리다‘라고 합니다. 자신은 그냥 소리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로고스 즉 말씀이십니다. 반면 세례요한은 ’소리‘입니다. 말씀은 본질이고 소리는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선지자로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던 그 일을 행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 세례요한인 인용한 그 구절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40장 3-5절을 보면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여기보면 여호와의 길을 예배하는 소리가 등장합니다. 그 외치는 자의 소리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게 될 것을 예배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골짜기를 돋우고, 높은 산이 있으면 낮아지게 하여, 고르지 않는 것이 있으면 평탄케 하여, 여호와의 오심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길을 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높아져 교만한 자들의 마음을 낮추고, 영적으로 어두어져 여호와가 이 땅에 오셔도 보지 못하는 그 낮고 천한 자들의 눈을 띄우는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를 알아볼 수 있도록 외치는 자의 그 사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는 소리의 역할, 즉 세례요한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가 묻습니다. 이번에 그들의 질문은 권위에 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정체성에 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권위에 대한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그들의 질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어떤 권위로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기 위한 세례를 베푸는가? 그것이 합당한가?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자신이 베푸는 세례는 참 세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세례를 줄 분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참 세례를 주실 분, 우리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실 그분이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는 “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14절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미 이 땅가운데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 그분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보았던 자임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한 강가에 있는 세례요한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였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듯 그렇게 물에 잠기시고 올라 오실때 하늘로부터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둘기가 예수님 머리위로 내려앉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비둘기가 땅위에 안착하듯이 그러한 모습으로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례요한은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세례요한은 그때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 바로 이 분이 메시야 그리스도이시구나. 그리고 그는 깨닫게 됩니다. 나는 그분의 샌달의 끈도 묶어줄 그러한 존재조차 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신던 신발은 가죽으로 된 샌들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의 종들이 주인의 샌들의 가죽끈을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이렇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분이 신발 끈을 풀기도 담당하지 못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날에 있었던 세례요한의 첫 번째 증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첫 번째로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선지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요한 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마11:11)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는 바로 우리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만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찍 참수당하여 예수님의 사역과 그분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한 이 모든 지식을 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소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분명하고 큰 소리일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장 우리의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했던 그 첫 번째 증언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그 분이 여기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소리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교회의 사명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교회는 그 결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사명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처럼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하고 흔들림 없이 이 사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본질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소리로 전파하는 자들입니다.
소리에 본질을 담으면 그것은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좋은소리여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고 해도 스피커가 않좋으면 듣기 싫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좋은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담고 있는 그 본질을 표현하기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과 소리가 일치할 때 우리가 간직한 복음은 더 풍성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전파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