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5.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2016.6.26
요한복음 3:22-30
22.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강해 15번째 시간으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장면이 바뀌어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1장에서 그의 증언이 언급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시 등장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언급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세례요한의 증언을 다룰 때 이미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만 그는 당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요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 요한에게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세례요한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면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십니다. 유대 땅은 이스라엘의 남부지방입니다. 중앙이 사마리아지역이고 북쪽이 갈릴리 지역 이렇게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2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는 것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세례를 문제 삼았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어느 곳인가 하면 살렘 가까운 애논 지역입니다.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고 다만 요단강물이 흘러가는 지류중에 어느 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23 “거기 물이 많음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요단강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리 넓거나 깊은 강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강들처럼 그렇지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강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이라고 해야 우리나라의 좀 하천 정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이 많지 않으니까 세례를 베풀기가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죠. 왜냐하면 세례를 하려면 물에 잠겨야 하기 때문에 수량이 많은 곳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의 제자 중에서 유대인과 변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25절에 보니까 정결예식에 대한 변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자들이 세레요한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합니다.
26절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전에 선생님께서 요단강 저편에 있을 때 증언하셨던 이가, 여기보면 예수님에 대하여 랍비라던가 선생님이라던가 하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증언하시던 이’로 말하는 것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히 감정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를 베푸니까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미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생겼고 뿐만 아니라 유대 전역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자 모였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님에게로 이탈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상당히 불만스러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한 이후에 요한 공동체가 상당히 위축되었고 그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데, 자신들의 리더인 요한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27.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 곧 하나님께서 하시게 하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역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자신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를 증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신랑의 친구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크게 기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례요한의 자신의 사역의 목적과 정체성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까지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이미 1장에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1장에 보면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찾아왔었죠. 당시에 요한이 일으켰던 회개의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혹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여 물으러 온 것입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22절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자신은 단지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26-27절에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것이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사람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자신은 소리일 뿐이고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 이것을 보면 세례요한은 죽는 날까지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소리로서 그 분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사람들이건 그의 제자들이건 상관없이 그 누구든 세례요한에게 너희 사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는 나는 단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일 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며 그리고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본질적 사명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역이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라고 말하면 교회는 전도만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전도만 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는 전도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의 사명이 있습니다. 예배, 전도 또는 선교, 양육 또는 교육, 교제, 봉사 또는 구제입니다. 이 모두가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명의 중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드립니다.
양육과 교육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교제합니다. 교회는 동우회 모임이 아니죠. 예수를 머리로 한 지체가 되어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구제하고 봉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흔들리지 않고 죽을 때 까지 이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갈등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삶의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합니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합니다. 아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삶을 진지하게 살고 모든 선택과 결정 속에 나의 유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좀 더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께 향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주변 상황과 주위사람들에 의해 흔들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례요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자세는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번째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가? 그것이 기쁨입니다.
29절에 보면 세례요한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어 많은 사람이 그분께로 향하게 될 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라고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결혼식 문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결혼식 문화는 신랑의 친구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신랑친구는 신부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결혼식을 주관하고 혼인예식 날에는 신부의 방 앞을 지키다가 신랑이 오면 기쁘게 신랑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향하여 갈 때 마치 신랑의 친구가 신랑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듯이 자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오히려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되고 승승장구 할 때 기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기쁩니다. 그토록 원하던 것들을 이룰 때 기쁠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인들에게 있어 내 집 마련이라는 것은 큰 기쁨 중에 한 요소일 것입니다. 청년들의 경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줄 때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내가 노력한 만큼 좋은 성적을 거둘 때 기쁠 것입니다. 제가 아이를 뒤 늦게 키워 보니까 그 기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에게고 향하게 될 때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모습을 볼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그 일에 조금이라도 기여가 될 때 너무나 기쁜 것입니다.
(대학원 진학 때 면접이야기)
신학대학원 필기시험후에 면접을 볼 때 일입니다. 그때 상담학 교수였던 이관직교수가 저를 면담하였습니다. 신대원에서 대부분 물어보는 것이 소명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관직교수가는 상담학교수여서 인지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 짧은 순간 어릴적부터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인지 필름이 돌아가듯 순식간에 제 인생이 지나가가 어느순간 딱 멈추었는데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지난 수련회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중고등부 아이들이 말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기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좀 감동받는 듯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얼굴이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너무 기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수님이 저를 잘 봐주셔서 나중에 조교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마도 저에게 소명이 무엇이냐 물어보았다면 이미 준비했던 멘트를 했을 텐데 그러한 질문이 오히려 제게는 소명을 더욱 확신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신학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또 앞으로 신학의 길을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똑 같이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확신이 드시면 그 길을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나 선교사와 같은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로 인해 이루어질 때 기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았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하며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는 여기서 세례요한의 삶의 목적과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30절에
30절에 보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 말합니다. 세례요한에게 있어 그가 가야 할 길은 예수가 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은 쇠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He must become greater; I must become less. 여기서 must라는 단어를 씁니다. 영어에서 must는 굉장히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한 당위성에 대한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반드시 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반드시 쇠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예수가 흥해야 하는 것은 이해되는데 왜 내가 쇠해져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내가 흥해져야 예수님도 흥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어야만 예수님도 내 덕에 흥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은근한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을 고지론이라고 합니다. 한때 청년들 사이에 유행했던 사상입니다. 인생에 성공함으로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작년 뉴질랜드에 방문했을 때 한 성도님을 만났는데 자녀가 프로골퍼 리디아 고와 함께 골프를 배운 아이입니다. 리디아 고보다 몇 타가 뒤져서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다가 골프를 포기한 상태에서 그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늘 네가 골프로 성공했을 때 네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큰 도구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흥해져야 나로인해 예수가 흥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나의 쇠함이 예수님의 흥함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인생에서 성공하고, 건강하고, 자녀 들고 잘 되고 만사형통해야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흥함은 내가 쇠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는 항상 부유할 때 잘 나갈 때 타락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핍박받을 때 복음이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흥해야만 그리스도께서 흥해진다고 오해하셔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메시지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에서 간증되어지는 많은 이야기들이 성도들이 성공사례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믿고 돈 많이 벌었다. 예수님 때문에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예수님 때문에 지금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등등. 이것은 기독교 진리와는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사업에 실패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날 사랑하십니다. 내가 암에 걸려 지금 죽어가지만 – 암을 극복하여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 나는 이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내가 비록 가난하고 병들고 자식들도 모두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내가 흥함으로 예수가 흥해진다는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실패하고 병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흥함과 예수의 흥함은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결국 쇠함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결국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여 죽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죽음을 딛고 십자가로 나가십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입니까? 흥함의 길이 아니라 쇠함의 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와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남들이 다가는 흥함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포기와 희생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란 바로 쇠함의 길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이 무엇인지 찾고 그 길로 걸어가셔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손해 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라면 그 길로 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들과 유익들을 포기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쇠함의 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낼 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겠습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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