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07-12 18:17

요한복음 강해 17.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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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7.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4:1-15

1.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만남일 것입니다. 학생들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학창생활이 즐거울 것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 또한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는 것,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한 목회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로 한번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을 파멸로 치받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나의 삶에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게 될 메시지의 주제는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을 살피면서 과연 우리 인생의 참만족과 기쁨의 원천은 무엇인가? 에 대해서 나누길 원합니다.

 

1.찾아오시는 예수님
첫 번째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3-4절을 보니까...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여기서 "하겠는지라"이 어투는 의지적인 표현입니다. 그곳으로 "꼭 가야겠다" 라는 예수님의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남쪽 유대지방에서 북쪽 사마리아로 가는 길은 세 가지 통로가 있었습니다. 서쪽의 해안길과 동쪽의 산악길 그리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중앙의 직선도로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직선도로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이 유대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혔다고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BC 8세기경에 앗시리아 인들이 북이스라엘을 침략하면서 사마리아 지역에 혼혈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중 일부는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민족적인 순수한 혈통이 더럽혀 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곳을 꼭 가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마리아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수가성 우물가에 있는 한 여인을 만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반기거나 환영하거나 인정해 주거나, 또한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가시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꼭 만나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선물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이제 진행되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정 중 지치셨는지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따르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갔습니다. 예수님 홀로 우물곁에 계십니다. 그때 물동이를 머리에 진 여인이 저쪽에서부터 걸어옵니다. 여러분이 이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시간이었습니다.(6절, 여섯시)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느라 거리는 적막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때 저쪽에서부터 물동이를 진 여인이 우물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옵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예수님께서 만나고자 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건넵니다.
"물을 좀 달라"

보통 일반적인 경우라면 물 한잔 떠서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차갑고 냉소적인 말투로 쏘댑니다.
9절에 보니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니까"
경계심을 가지고 응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피해의식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들추어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0절에 보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생수를 줄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합니다.
11절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여인이 보아하니 생수을 준다는 사람이 물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생수를 준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3절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16절에 보니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한다면, 이렇게 연결되야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너에게 생수를 주겠다" 또는 "내가 네게 주고자 하는 생수는 이러한 것인데...." 하면서 생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보게 하시는 예수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생수를 마시는 것과 남편을 불러오는 것이 무슨 연관성이 있습니까? 이건 무슨 생색내는 것도 아니고 생수를 주겠다는 분이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여인을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여인 안에 있는 삶의 문제를 끄집어내기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야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즉 생수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삶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드러납니다.

 

17절에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자신의 삶에 문제를 건드린 예수님께 직각적로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대부분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 알거나 지적하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예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문제아동들이 등장합니다. 욕을 하는 아이, 폭력적인 아이, 말을 안하는 아이 등등, 그런데 이러한 문제아이들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비슷합니다. 먼저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모습을 촬영해서 당사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부분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무언가 문제가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영상을 보여주는 순간 상황은 바뀌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를 대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이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대하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그 부모가 자신의 잘못된 모습이 담겨있는 영상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것입니다. 자신의 숨겨진 내면세계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잘못을 보면서 합리화 하거나, 회피해 버린다면 그 가정이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건드린 예수님의 질문을 회피해 버립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사실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면 이 대화는 종결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녀의 문제를 정확하게 끄집어내십니다.
17절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우리는 여기까지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통해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남편을 여섯이나 둘 수밖에 없었던 여인입니다.
그러한 여인의 영적상태와 내면세계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것은 주어진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삶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삶에 만족과 기쁨을 줄 새로운 만남들을 찾아 다녔 것 것입니다. 새로운 남성과의 만남을 통해 처음엔 흥분도 되고 기쁨을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만족과 기쁨은 잠시뿐, 닥쳐오는 삶의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그는 또 다시 우울해지고 외로워지고 허무해 지는 인생의 쓴 맛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매일 야곱의 우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은 수가성에서 2km나 떨어져 있습니다. 삶에 허무와 외로움 그리고 그 영혼의 갈증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그녀가 직면하고 인정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허무와 외로움의 문제
이것은 비단 이 여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에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 삶에 무언가 더 채워져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지금 간절히 원하는 것, 그것이 주어진다면 만족하고 행복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잠시동안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좋은 집에 살면 만족과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장의 액수가 올라갈수록 우리의 행복지수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직장의 지위가 올라가고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일 때 그 속에 만족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차, 명품 옷과 핸드백, 로맨틱한 만남, 동우회모임, 취미생활....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잠시뿐입니다. 우리에게 참만족과 기쁨의 근원이 되지 못합니다.

 

최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생활고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도 많지만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자살을 합니다. 유명연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돈이 없습니까? 인기가 없습니까? 그들이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참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모이신 분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접 압니다. 우리가 외롭다는 것, 인생이 참 쓸쓸하다는 것, 그것을 잊기 위해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 보지만,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매일 우물을 찾듯 그렇게 살아보지만.... 그 뒤에 오는 허무함은 더 크다는 것.

예수님은 이 시간 그것을 인정하길 원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네가 붙잡고 있는 그것이 진정 너에게 참만족과 기쁨을 주는 생수가 되었는가?
현재 내가 붙잡고 추구하는 것들이 진정 나에게 참 만족과 기쁨을 주는 생수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주님
예수님은 그러한 인생들에게 찾아오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말합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인을 자신을 찾아 오시고 그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을 말합니다.

25-26절을 보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8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28절의 물동이를 버렸다는 표현을 통해 그녀가 헛된 것을 추구하는 삶을 버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피해 다녔던 사람이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여인이 자신과 대화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천한 자신을 찾아오셨음에 감격한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녀에게 생수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으면 삶이 변화됩니다. 허무한 인생, 외롭고 쓸쓸한 인생이 기쁨과 만족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여전히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게 되면 그러한 것들은 능가하게 됩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공간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려는 헛된 노력을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생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가 인생의 모든 허무함과 외로움 가운데 있는 우리를 은혜의 기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