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08-04 17:17

요한복음 강해 20. 참된 믿음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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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20. 참된 믿음/2016.7.31.

 

요한복음 4:43-53
43.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요한복음 강해 20번째 시간으로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요한복음 서론 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은 상당히 세밀하게 구성된 책입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때 그것이 상대방에게 잘 이해되도록 하려면 구성이 필요하죠. 마찬가지로 사도요한도 이 글을 기록하면서 20장 21절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 함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끔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사역의 행적을 치밀하게 구성하여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2장부터 4장까지 오면서 예수님의 행적을 잘 보면,
처음 갈릴리 가나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시죠. 그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리는 북쪽이고 예루살렘은 남쪽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시위하시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무시면서 니고데모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지역을 떠나서 고향인 갈릴리로 가시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이 언급한 것처럼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그리고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그곳에서 여인을 만나게 되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3절을 보시면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며...”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46절에도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예수님께서 처음 표적을 일으키셨던 그 곳으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건이 등장하고 5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마칩니다.

이러한 구성은 2장부터 4장까지가 하나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렇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장의 내용이 하나의 써클을 이루면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두 번째 표적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2-4장을 한 단락으로 보면 첫 번째로 우리 인간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기쁨의 축제가 벌어져야 할 그곳에 흥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잔치는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없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잔치는 지속되지만 기쁨이 상실되었습니다. 기쁨이 없는 잔치는 더 이상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무언가 결핍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6개의 돌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결례를 행하려고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인간 스스로의 그 어떤 노력과 종교적인 행위가 아무런 보탬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곳에 유월절 명절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전 안에는 동물들을 파는 사람들이 있고 돈 거래가 오고가고 있습니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동물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종교적인 제반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것을 이용하여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곳에 오셔서 모든 것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무엇입니까?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나십니다. 그는 이러한 인간적 노력과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최고수준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조차 없는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당대에 구약성경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거룩함과 정결함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지만 그가 가진 부와 권력과 종교적인 거룩함의 노력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무엇입니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십니다. 이 여인, 삶의 공허와 무의미 가운에 자신의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6명의 남자와 동거했던 여인,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 아닙니까? 삶에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돈과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왕의 신하로서 자신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왕의 신하라고 할 때 그것은 상당한 재물과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서 자신이 가진 물질과 권력으로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의 생명의 문제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2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인간들의 한계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대부분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어느 정도 돈과 권력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자, 그래서 그것을 다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망각하고 살죠. 생명의 문제를 망각한 체 열심히 일하고 돈 벌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 버는 것에 혈안이 되어서 생명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 전 대기업 회장의 성매매 동영상이 유포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는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재산이 14조 800억원입니다. 국내 재산순위 1위, 세계 85위입니다. 그가 가진 부와 권력이 그를 살려낼 수 없습니다. 이제 그의 모습에는 추함과 초라함만이 남겨있습니다.

 

여러분, 왕의 신하가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 청년들이 계시는데 여러분들이 빨리 깨달으셔야 합니다. 돈과 권력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삶의 문제가 그것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행한 것은 돈이 없어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한 것도 돈이 없어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한 것이 돈이 없어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문제를 물으면 그들은 회피합니다.

 

만일 오늘밤 당신이 죽게 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 앞에 진지해지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남의 일로만 여겨집니다. 그리고 막연히 먼 미래에 일어날 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시대는 생명의 문제 앞에서 진지하지 않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꺼져가는 아들의 생명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바로 깨닫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소망이 없구나, 내 삶의 참된 만족과 기쁨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룸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얻어도 생명에 문제가 생기면 다 잃는 것입니다.

제가 2010년에 뉴질랜드에서 사역할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폐암3기 말이라는 것을 전화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일 후에 교회 청년들과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한참 청년들과 재밌게 사역할 때 였습니다. 그 여행길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간혹 영화를 보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버켓 리스트를 정해놓고 한 가지씩 이루면서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 시한부 인생은 아무리 좋은 것 먹고 좋은 곳에 가더라고 기쁘지 않습니다. 낮에는 웃고 떠들어도 밤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엄습해 옵니다.

 

먼저 우리는 생명의 문제 앞에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바르게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그 어떤 해답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신하가 요청합니다.
49절입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신하의 아들은 가버나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갈릴리 가나입니다. 24km떨어진 곳입니다. 걸어서 가면 5-6시간 정도 걸립니다. 긴박하게 와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종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아이가 살아난 것을 전하기 위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하는 아들이 낳은 것이 먼저는 가장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확인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낳은 것이 진짜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낳은 시각을 묻습니다. 그랬던 어제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할 바로 그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53절을 보시면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자,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생 또는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아이가 죽을 병에서 살아난 것은 우리의 구원이 바로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들이 낳았다라고 하지 않고 살았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난 것이 예수님의 말씀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리서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죽음의 상태입니다. 47절에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죽음이 지배하는 상태, 죽음에 걸려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속에서 각종 질병으로 나타나지요. 질병은 죽음에 걸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상 아닙니까? 이러한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5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말씀이 선포되는 시각에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3장에서 거듭남을 설명할 때 에스겔37장에 마른뼈의 환상을 염두해 주시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할 때 마른뼈들이 살아나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죽어있던 생명이 살아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50절에 “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3절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과 기적을 보고 믿는 것에 대하여 비교하고 있습니다.


48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는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질타하신 장면입니다.

2장 23-24절에도 보면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의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반면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동네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4:41-42
“41.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성경은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여주는 가장 정직하고 정당한 믿음은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그 말씀을 믿게끔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48절에서 “너희가 이적과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고”한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믿게끔 하는 것입니다.


<요 11:40-42>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가 도무지 믿지 않으니까 이러한 표적을 통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표적이라는 의미가 영어로 sign인데 표지판이라는 것입니다. 표지판의 목적인 그것이 가리키는 것에 있듯이 표적은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주어진 것이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표적이 없이도 말씀만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복되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20:27-29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자들,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믿죠.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기록된 말씀을 통해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이 기록한 내용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한 성경을 보고 믿게 된 것 아닙니까 그들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유일한 길은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신비한 기적을 보고 믿음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신비한 경험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을 성경은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잘 들어보면 무속신앙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무속신앙의 대상이 그저 예수로 둔갑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른 신앙인들은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방언,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낸다고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22-26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우리가 생명을 얻고 그 분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인생의 반석이 되어 살아갈 때 그것을 참된 믿음, 복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길로 걸러가시길 축원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