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1. 허무한 인생가운데 찾아오신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5:1-16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이 그리고 이 사건은 17절 이후에 있을 안식일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5장 전체가 오늘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지난주 왕의 신하를 살린 사건이 갈릴리지방 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명절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아마도 이때가 오순절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명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명절분위기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와중에 양문이라는 곳으로 가십니다. 양문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중에 하나입니다. 이 문을 통해 제사에 쓰일 양들이 지나가게 되어서 양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곁에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는 베데스다 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못을 중심으로 행각 다섯 개가 둘러서 있었습니다. 행각은 햇볕이나 비를 피하기 위해 기둥위에 지붕이 연결되어 있는 건물을 말합니다.
그곳에 누가 있었는가 하
면, 3절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혈기마른 자들이란 중풍병을 말합니다.
그들이 그곳에 누워 있는 이유에 대하여 3절과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물이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못은 주기적으로 물이 그쳤다 이어졌다하는 간헐천이었습니다. 그래서 간혹 지하에 있는 물이 끓어 올라오는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 것입니다. 아마도 그 물이 온천수였기 때문에 치료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치료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가신 것입니다. 어디를 지나가다 우연히 들리신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병자들 틈 사이를 지나 누워있는 한 사람 앞에 멈추셨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질병 가운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38년이라고 하면 거의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한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베데스다의 물이 동하는 것이고 그때 맨 처음 그 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의 질병이 심각했고 자신보다 좀 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는 많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물이 동한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맨 먼저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곳에 왔을 것입니다. 가족이던 이웃이던 누군가 이곳까지 데리고 왔겠지요.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하루종일 그곳에 계속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단 한가지입니다. ‘물이 동할 때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리라!’ 그러나 자신도 그것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본성 중에 하나가 생존욕구입니다. 어떻게 하든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나름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보면 간혹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상황 속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매일 밤 술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도 살기 위해서 술을 먹는 것입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안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우울하고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고,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이 술을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만을 보고 그것을 고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잠깐 변할 수는 있지만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죠.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고 접근하지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죠.
38년 동안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있던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낫고 싶었습니다. 아니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는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살기위해서라도 나을 수 있다는 소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10년 20년 지속되면서 낫고자 하는 소망은 그저 막연한 기대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 마음가운데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면 살아갈 소망이 없으니까 그저 막연하게나마 이곳에 찾아와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라고 하면 마음은 편안한 것입니다.
여러분! 38년 된 병자의 모습을 잘 보면 우리 인류가 처한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면 우리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인류는 악과 고난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 그리고 각종 범죄들, 질병과 가난과 굶주림, 이런 것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이러한 악과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과학을 발전시키고 교육의 질을 높여 인격을 함양하고 의술의 개발을 통해 질병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복지정책을 통해 가난과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더 악하고 위험한 세상이 되었습니까?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리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내가 원하는 위치에 올라가면 내 삶에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로움에 사람들을 찾을 것이고, 술을 먹을 것이고 유흥을 즐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원하고 소망하는 것을 다 이루어도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더 악하고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달려가지만 그럴수록 허무하고 허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계속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면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다음 주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하나 현실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죽음 앞에서 서 있는 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부끄럽고 더럽고 추한 죄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끝이라고 한다면 쾌락주의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쾌락을 즐겨도 더 허탈해지고 허망해 집니다. 이제 휴가철도 지나가는데, 만일 누군가 계속 돈을 대줄테니까 마음껏 놀고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 딱 2주만 놀아 보세요. 재미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 앞에 아니 우리 곁에 죽음이 늘 따라다닌 다는 것이고, 그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며, 또 이 땅에서 수고하고 노력하는 모든 것들이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38년 된 병자인 것입니다. 막연하게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 잘 될 거야 하면서 위로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병자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보면서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물이 동했다고 해봅시다. 과연 그중에 누가 못으로 가장 먼저 가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낳고자하는 의욕도 없고 살고자 하는 열정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히 베데스다에 낫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물어보신 것입니까?
실제로 38년 된 병자는 낫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포기한지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는 것 보다 싫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낫을 수가 없다는 것, 내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은 무언가 희망이 있어야 살아가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은 질병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께 이런 저런 설명을 합니다. “네 낫고 싶습니다. 대답하면 됩니다. 정말 낫고 싶었다면 그렇게 대답하겠죠.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낫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에 급급합니다.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 동안 낫을 수 없었던 자신의 신세에 대하여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내 불행의 원인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밖에 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환경을 탓하고 가족을 탓하고 주변 사람을 탓하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나를 꾀어 먹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아담 적 죄의 모습입니다.
만일 물이 동할 때 누군가 그를 데리고 가장 먼저 물에 넣어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과연 그가 낳을까요? 그 물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 소망이라고 붙잡아야 살 것 같으니까 병자들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38년 된 병자를 통해 두 가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38년 병자의 소망 없는 모습과 둘째는 그가 붙잡은 소망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소망이라는 것도 헛된 것들입니다. 저희 아이가 이제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보니까 자기 장남감을 의지해서 일어서는데 자꾸만 넘어집니다. 움직이는 물건을 붙잡으니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꾸만 움직이는 것들을 붙잡고 그것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돈을 붙잡고 권력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유동적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붙잡은 사람들은 모두 넘어집니다.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허탈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8절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9절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자 병자가 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낫게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는 삶에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자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의 질병이 나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임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처럼 잔치는 있지만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삶은 있는데 만족과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바로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이 찾아왔고 그 죽음의 증상인 각종 질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들이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자 자아를 실현하여 무언가 의미 있는 삶으로 남고자 했지만 그것 또한 허망한 일입니다. 이 땅에 자기 이름 석자 남기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일입니까?
그래서 14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이 말씀은 그 사람의 특정한 죄 때문에 38년 동안 병자로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진리는 포괄적이어서 우리의 모든 질병은 결국 그 원인이 인간의 범죄함에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 인생은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8년 병자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가운데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은혜의 집에 은혜의 원천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38년 된 병자를 만나시고 말씀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망없는 우리 삶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우리에게 -마치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려 하듯- 헛된 바램을 의지하고 기대하며 살아가던 우리에게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의미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인생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만이 삶에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주어짐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음주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만,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쉼을 가진 날을 기념하여 우리에게도 쉼을 주신 날입니다. 따라서 이날은 생명의 충만함으로 가득차 쉼과 누림이 있어야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날에 병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이 파괴되어 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말미암아 안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인생을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생명을 주시고 우리 삶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사 비로서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 땅에서 안식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고 그 분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안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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