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2. 일과 안식/2016.8..14
요한복음 5:9-18.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한복음 강해 22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죠.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병자의 모습. 그것은 우리 죄인들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이 땅에서 붙잡은 소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세상 가운데 찾아오시어 병들어 누워있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것은 그분의 은혜 아니면 우리 인생이 설 수 없음을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은 사건을 두고 유대인들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이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에 일을 금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출20). 그런데 당시 경건운동을 펼쳤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금지된 일의 항목을 39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죠. 그들은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거룩함과 경건함을 추구했던 자들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율법준수에서 탈피하여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거룩함을 추구하자는, 그래서 세속적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철저한 율법준수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려고 했던 운동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어떻게 하면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가를 연구한 것입니다. 그 결과 39등급의 금지된 노동목록이 나온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어떤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것으로 옮기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 이 병자가 안식일인데 자기가 누었던 돗자리 같은 것을 가지고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안식일을 어긴 것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에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12절에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고 캐묻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람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게 얼토당토한 일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죠. 여기서 잘 보면 유대인들은 이 병자가 낳은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너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침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시면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명절이라 양문 주변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자가 고침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리를 늘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장면이 성전 안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고침받은 자와 예수님이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그가 성전에 들어간 것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병이 나았음을 제사장에게 보이거나 치료된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가 어떤 특정한 범죄로 인해 병이 들었으니 또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성경의 진리를 포괄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죠. 결국 질병이라는 것이 죄의 결과로 인류에 온 것이기 때문에 넒은 의미에게 더 심한 질병에 걸리지 않게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심한 것을 최후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후에 있을 예수님의 말씀이 마지막 날에 생명을 주기도 하고 심판을 주기도 한다는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16절에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아마도 그들이 예수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을 범한 것에 대하여 시비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7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박해했던 유대인들이 혈안이 되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그처럼 첨예한 논쟁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핍박까지 받으면서, 또한 그들에게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예수께서는 왜 하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주장하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래 성격이 좀 괴팍하거나 얄궂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골탕 먹이려고 그렇게 한 것일까요? 좀 서둘러 하루 전에 병자를 고치든지 아니면 조금 기다렸다가 다 다음날 치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처럼 큰 논쟁과 갈등과 위험을 불러올 일을 왜 그렇게 꼭 안식일에 해서 유대인의 적대감을 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선 안식일이 어떤 날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이 말하는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원래 의미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행하신 창조 사역을 통해 완성된 피조물, 즉 심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창조하는 일을 마치셨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든 것이 심히 아름다운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곧 생명이 충만한 창조를 기뻐하고 즐긴다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뜻입니다.
창세기 2장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원래는 안식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그것을 누리고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에덴에서는 일이 없었는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고 보전하고 다스리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 처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주셨을 때 그것은 그 일을 통해 기쁨을 누리라고 주셨던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대부분 시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하죠. 거의 12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공부합니다. 그런데 좋은 성적이라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 모든 과정은 그것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수단이 되어버리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어떠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에 아직 도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험결과 내가 원하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그 동안의 모든 시간과 노력들이 의미를 잃고 맙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공부를 통해서 주고자 하시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실 공부의 목적은 수능이 아닙니다. 공부의 목적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고 그것을 통해 창조세계를 보전하고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피조물들의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은 마치 과학자들처럼 사물의 본질과 원리를 탐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악된 원리를 피조세계에 적용하고 확장함으로 피조세계를 다스린 것입니다. 마치 과학자들이 인간을 연구하여 로봇을 만든 것처럼, 아담의 일이 그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생명이 충만한 창조세계가 타락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담이 사탄의 속임을 받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풍성함에서 멀어져 인간의 제한된 내적자원으로 밖에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어 죽음이 찾아왔고, 하나님의 지혜에서 분리되어 한 치 앞의 일도 알 수 없어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원에서 분리되어 서로의 자원을 착취하여 내 삶을 확장하는 동물적인 삶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류는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명을 일으켜 제한된 자원으로부터 오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과 의학 그리고 교육 등을 통해 죄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제에 대항하여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의학을 통해 죽음의 증상인 질병에 대항해 온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을 교화시켰던 것입니다. 법과 제도를 통해서 죄악된 인간들의 행동 반경을 묵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부터 분리된 인간은 일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라는 것이 살기위한 수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일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국열차 영화를 보면 기상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얼어 붙지 않습니까?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한대가 끝없는 궤도를 달리고 있죠. 이 기차가 멈추면 다 죽은 것입니다. 마치 인류는 그와 같이 계속해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일하는 자들은 생존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일의 기쁨은 전혀 있을 수 없고 착취와 불평등과 치열한 경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어떻습니까? 기쁨도 없고 안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안식일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안식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지만 진정한 안식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안식을 누리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살지만 안식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정 안식이 있습니까? 한국인의 경우 40대 사망률이 세계1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으라고 일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죽으라고 일하면 내 앞에 안식할 날이 오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안식할 날이 없습니다. 삶속에 일어나는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진로에 대한 문제, 노후에 대한 문제 등, 우리 삶은 끊임없는 문제와 그것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뉴질랜드에 살 때 아내가 일했던 스시집 사장님은 한국에서 공무원으로 있다가 온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쉼을 꿈꾸며 그곳에 온 것입니다. 치열한 한국의 경쟁사회를 떠나서 이민을 가면 무언가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장님은 스시집을 하면서 한번도 주일에 쉰적이 없었습니다. 주일 아침 잠깐 교회에 갔다 와서는 다음날 장사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어느날 제가 차를 타고 아내를 픽업하러 갔을 때 였습니다. 뒷문 바깥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피로함과 지친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가계 사모님은 암에 결려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안식을 찾아 이민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안식이 없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안식일의 율법조항을 열심히 지킴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안식은 깨어졌고 그 깨어진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부터 보겠습니다.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즉 안식일은 처음에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그것을 누리고 기뻐하는 날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안식이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또 다시 안식의 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5장 12절부터 보겠습니다.
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15절에 보면 너희가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너희를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창조에서 구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에게 안식은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때에 비로소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안식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제 약속의 땅에 너희를 들어가게 할 것이니 그 땅에서 안식일을 지키며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이것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너희를 완전하게 구원할 그 날을 기대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될 때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임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결국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지켜오던 안식일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의미하는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안식일(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 까지)을 지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일요일에 모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안식을 이루신 날이 바로 주님의 부활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날을 줄여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것을 더 축약하여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 모여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오게 될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안식하게 됩니다. 비록 그 안식은 제한적입니다. 완전한 안식을 잠시 동안 맛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도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에게 일이라는 것도 이제 먹고 살기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주셨던 목적으로서의 일로 회복되었다는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 그것은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일을 통해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을 그 일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가 일을 대할 때의 자세입니다.
새벽마다 동네를 청소하는 분들은 청소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깨끗하게 보전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은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질서를 배워가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주부들이 집에서 살림하고 남편 뒷바라지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 팽개치고 교회에 와서 주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6일을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되면 이렇게 예배당에 모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분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 만큼은 우리가 했던 일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것이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면서 내 삶에 가장 가치있는 분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쉼을 통해 육신의 안식을 누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금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이 우리를 감사하게 만들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과 안식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시각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남은 시간을 보람있게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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