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3. 사망에서 생명으로 2016.8.21.
요한복음 5:18-30
18.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 강해 23번째 시간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치유 받은 사건을 통해서 거듭난 성도에게 있어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안식일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는 것은 안식일이 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셨다는 것은 깨어진 안식을 회복하여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용은 소망 없는 삶을 살아가던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시고, 또 안식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 그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 어떤 일을 하시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 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주장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하나님과 자신이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처럼,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신을 설명하여 이해시키고자 할 때는 인간의 세계 속에 들어와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장하실 때 사용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처럼 신적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2천년에 역사가운데 살았던 한 청년 예수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순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더니 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다. 고로 나는 신적존재이다 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사실에 대하여 편안하게 듣고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깁니다.
한 인간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대망상증 환자라던가 아니면 사이비 교주라던가 또는 사기꾼들이 그렇게 할 수 있죠. 그래서 CS.루이스의 말처럼 이러한 주장은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던가 아니면 미치광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공자 부처 간디 처럼 우리가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성자라는 것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주장하실 때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 “인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27절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또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6장에 가면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당시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호칭이 있었습니다. 랍비, 선생님, 선지자 등,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지칭하실 때 항상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인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풀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쉽게 생각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인성을 겸손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자라는 표현을 알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다니엘서를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의 환상가운데 본 것은 하늘에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앞으로 인도되고 소멸되지 않는 권세와 영광을 주십니다. 여기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왔다고 하는데, 구약에서 하늘 구름이 동반될 때는 하나님의 존재가 임할 때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도 그랬고, 광야에서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도 구름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구름은 항상 신적존재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 즉, 사람의 아들과 같은 존재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존재인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적존재, 예수님은 바로 다니엘서 7장에 등장하는 그 사람의 아들의 모습을 한 인자가 바로 나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 주저함없이 인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듣던 당시에 유대인들 즉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에게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참람한 말이었고 신성모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이처럼 자신이 신적존재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고 마침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지만 예수님은 물러서거나 주저하지 않고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2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그래서 사도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이것에 굉장히 분노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가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믿는 무리들이 있는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반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내어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행22:3-5).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 분이 신적존재라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실제로 팔레스타인 땅에 살다가 33세의 나이로 십자가에서 죽은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은 이것이고 이것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판가름 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도 또 신학교 교수들 가운데도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내가 진짜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부처나 공자처럼 좋은 가르침을 주시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분으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보면 당연하고 다 아는 이야기인데 제가 왜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가 하면, 이것을 정말 믿는다면 이 진리에 목숨을 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어릴적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진지한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이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내가 진짜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자주 들어서 쇠뇌당한 것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자신을 세워야 하는가 하면, 순교의 자리에 자신을 세워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 진리 때문에 죽을 수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 때문에 한번이라도 손해 본 일이 있습니까? 재정적 손해든, 무시당했던 일이던. 싫을 소리를 듣던... 또는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예수를 믿는 다는 것 때문에 포기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과 심판하는 일입니다.
19-20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일하심으로 나도 일한다 하시고 그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21-22절에 말씀하십니다
“21.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하나님의 사역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하시는데 그것은 당시의 가업계승의 그림을 통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가업을 계승하는 방법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이 한 일을 그대로 보여주고 따라하게 합니다. 이런 과정으로 통해 아버지의 일을 아들일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 땅에서 그대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생명을 주는 사역입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 즉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사건은 에스겔 37장의 마른뼈가 살아나는 일이죠. 이것에 대해서는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입니다. 요11장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니까 죽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던 자가 수족을 베에 동인채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죽어있는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자들인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어 내 자신의 생명력으로 밖에 살 수 없는데 이것은 마치 뿌리뽑힌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 뽑혔을 때 잠시동안 자신이 가진 생명력으로 살지만 죽은 것과 다름아닌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이미 죽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죽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면 우리의 죄의 문제가 사라져 다시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어 다시금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이 죽었을 때 그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잠깐 동안의 수면상태가 죽음이므로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 영생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1편의 말씀처럼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생의 삶은 나중에 우리가 죽은 다음에 또는 예수님께서 재림 하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지금 여기에서부터 영생의 삶의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완성된 천국에서의 삶과 비교하면 아주 미미합니다. 그것을 찬송가에서처럼 영생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영원한 생명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또 그것을 어떻게 맛보게 계십니까?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하나님이 사랑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이웃들이 나의 경쟁 상대였고 그들을 밟고 올라가야 나의 삶이 형통한줄 알고 살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하여 나의 생명력을 확장시키야 함으로 이웃의 것을 착취하고 거짓말하고 불법을 행하며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된다면 주저함 없이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을 꽉 채워 주셨기에 일단 욕심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 감사하게 됩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것들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샬롬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샬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내 힘과 노력을 의지하여 살아갔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감으로 버겨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처럼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니까 삶이 한결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것이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사역은 심판입니다.
27절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여기서 선한일이라는 것은 선한 일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24절에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악한 일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부터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며 죽어서 저 영원히 형벌 가운데 있게 됨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사단의 종이 되고 죽음의 권세아래 놓여 집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삶은 헛된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며 그 속에서 이웃을 착취하고 거짓과 불법을 행하며 그것을 정당화 시키고 합리화 시키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샬롬이란 있을 수 없고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뉴스를 보면 수십억의 뇌물을 받고 수백억을 탈세한 사람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자원을 확보한 사람들은 과연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까? 그렇지 않습니다.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연애인들을 언제 추락할지 몰라 늘 불안하다고 합니다.
경쟁해야 하고 빼앗어야 하는 삶 속에서는 결코 샬롬을 경험하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과 초도가 우리 삶에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속에서 살다가 결국 죽음 앞에서 초라한 인생으로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심판아래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표적인 사역은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경험하다고 마침내 완성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심판하시는 그 날이 우리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그날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살아야 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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