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8. 생명의 양식 예수
요한복음 6:30-40
30.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강해 28번째 시간으로 “생명의 양식,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썩을 양식 즉, 내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예수님 자신을 추구하라는 말씀임을 배웠습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다르죠. 그가 가진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살 때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 사람의 소유를 사랑한 것이라면 그가 병들거나 돈이 없어지면 무시하거나 떠나버리겠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 받더라도 예수를 떠나지 않죠. 참 성도는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니까.
만일 누군가 1년 동안 주일예배 안 드리면 1억원을 준다고 해봅시다.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성도라면 당연히 1억이 아니라 수백억원을 준다고 하여도 예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갈등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갈등한다는 것은 아직 신앙의 원칙이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이 우리 인생의 원칙과 기준이 되어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하는 것을 먼저 계산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성경말씀에는 뭐라고 하고 있지? 이것이 교회에 어떤 유익을 줄까? 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지 않고 당장 눈앞에 이익을 쫒아가니까 우리 인생이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결정한 것이니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버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비록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에게는 쉼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셨고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니까 그들이 표적을 요구합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30절에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첫 번째로 ‘네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자냐? 그러면 표적을 보여 달라 그러면 믿겠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으로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예수님에게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네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면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늘로부터 만나를 먹었던 사건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이 사건은 잘 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서 광야에 있을 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시죠. 이것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파종하고 곡식을 거둘 때 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면, 그것에 비견할 만한 표적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오병이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요단 동편의 넓은 광야지역 그 가운데 초원이 있는 푸른 들판에서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리들을 이러한 일을 경험하고도 또 다시 표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표적을 요구하는 신앙은 계속해서 더 강하고 자극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것 아십니까?
어떤 신비적 체험을 통해 신앙을 갖고 계속해서 그러한 체험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주 말씀 드리지만 신비적인 체험이 우리의 신앙을 강화시킬 수는 있지만 믿음의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기도하니까 사람들이 넘어지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있어요. 찾아보면 이런 일들을 주업으로 하는 용하다는 스님들도 있고 무당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비적인 일들이 있어야만 예수님을 믿는다 또는 신비적 체험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계속해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예수님께서 4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 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갑니다. 부자가 지옥이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요청하죠. ‘자신의 형제 다섯명이 있는데 나사로를 그 형제들에게 보내어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하게 해주세요.’ 합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고 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는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정말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서 내가 천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십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어요.“ 하고 증거하면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눅16:31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 이예요. 죽은 자가 살아나서 예수님을 증거하면 믿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으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처럼 신비로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적을 요구하는 것, 또는 계속해서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보여주세요. 제가 믿겠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또 신비한 환상을 보았거나 특별한 음성을 들어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경우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반드시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님을 믿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간혹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표적을 요구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33절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먼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지식을 교정하십니다. 그것은 너희 조상들이 먹은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인간 모세의 탁월함이나 신령함 때문에 주어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은 어떤 신령한 목사님이 기도해서 또는 권사님이 기도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를 봅니다. 그리고 모세를 의지하죠.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실망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내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로부터 주시는 참 떡을 뭐라고 표현하시는가 하면 33절에 하나님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군중들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34절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니까
15.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하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군중들도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을 우리에게 항상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가성 여인이나 여기 군중들을 보면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육신적 차원에서의 물이고 떡입니다. 물질적인 물이며 떡인 것입니다. 목마를 때 먹는 물이고 배고플 때 먹는 음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떡이라는 것은 그들의 주식을 말합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매일 먹는 음식이 떡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밥이라고 해야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생존의 문제를 ‘항상’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에고 에이미’ 문형이 등장합니다. ‘에고 에이미’는 ‘나는 나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 사용했던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할 때 사용했던 단어를 사용하여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떡, 하늘로부터 내려 생명을 주는 그 떡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사람도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도 ‘내가 곧 이데아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주 강력하게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또는 우리도 마찬가지죠.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당연히 예수가 우리에게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더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납니다.
셋째, 이 떡을 먹는 것은 곧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넷째, 따라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만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7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굳이 믿으라고 하지 않고 먹으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것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현실적이고 체험적인 것으로 설명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의 지식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기 신념이나 확신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오해가 없도록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기억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입에 넣어 삼키게 되면 그것이 분해되면서 여러 가지 화학적인 작용을 통해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게 됩니다. 식물은 물을 주어야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는 밥을 먹어야 살아갑니다. 먹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 하면 죽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뿌리 뽑힌 나무가 죽은 나무이지만 잠시 자신이 가진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우리도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제한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죽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죽은 새가 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바깥에서부터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 생명이 죽어있는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죽어있던 우리의 몸과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먹는 밥과 마시는 물이 혈액을 만들고 조직과 세포를 살려내며 산소를 공급하듯이 예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실 때 죽어있던 우리가 살아나 활동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가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나에게 생명을 주는 사건임을 믿는 것입니다.
2천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났던 그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아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생명을 주는 은혜의 사건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입니다. 아무리 풍성하고 맛난 음식이 내 앞에 있어도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처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내가 믿을 때만이 그것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최후의 만찬석에서 떡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 떡을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실때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교회는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1년에 두 번정도 하죠. 하지만 저희교회는 매달 첫 번째 주일에 합니다. 왜냐하면 성찬식은 자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기억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주님의 찢기신 몸을 내가 먹음으로 내가 생명을 얻었구나, 그분의 흘리신 피가 내 속에 들어와 내가 나를 죽어있던 나를 새롭게 하셨구나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뉴질랜드교회에 있을 때 함께 사역했던 목사님께서 성찬식이 있는 다음날에는 성찬빵과 포도주를 조그만 케이스에 넣어서 요양원에 가고 병원을 찾아가십니다. 성찬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목회하면 저렿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찬식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의 살을 피를 성찬을 통해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생명의 우리안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예수가 나와 연합되었음을 믿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명확한 확신을 줍니다. 첫 번째로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심 때문이라는 것이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의 확신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마지막 날 까지 인도하시고 마침내 다시 살리신 다는 것입니다.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그 은혜에 디시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책임져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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