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9. 너희도 가려느냐?/2016.10.2
요한복음 6:60-71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탄생, Birth)와 D(죽음, Death)사이의 C(Choice)다.”라고 했습니다. 탄생과 더불어 죽음 사이에 삶이 있고, 그것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선택들이 있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선택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들의 상황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어떠한 선택은 우리에게 성공적이어서 기쁨을 주기도 했고 어떤 선택은 실패와 좌절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우리가 선택한 것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이 우리 삶에 중요한데 이러한 선택을 하게 하는 내면의 근거가 있는데 그것이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연휴에 놀러가는 것 보다 예배드리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택한 학생들은 현재를 즐기는 것 보다 미래에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현재의 만족을 지연시킨 것입니다.
결국 선택은 내가 가진 가치관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이 내 삶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나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을 때 만족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만족이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가치 있게 여기던 것을 소유하게 되는 순간부터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상위에 있는 가치들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소유하기 전에는 그것만 있으면 내 삶에 만족이 있을 것 같았는데 소유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허탈감을 느끼고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에는 상대적인 가치가 있고 절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환경에 의해 바뀌는 가치입니다. 반면 절대적 가치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고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 사회는 상대적인 가치들이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은 상대적인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가치와 교환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질 뿐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을 때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 백억원을 가진 사람이 문명사회와 단절된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마을에 들어갔다고 해봅시다. 그가 가진 돈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가치가 우리 사회에 절대적 가치처럼 포장되어 다가옵니다. TV광고를 보면 이 아파트에 살면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이 차를 타면 보다 멋있고 세련된 사람이 된다고 광고합니다. 우리는 상대적 가치가 우상이 된 사회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상대적 가치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된 만족이나 행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먹어도 해갈되지 않는 바닷물처럼 우리 인생을 더 공허하고 의미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면 만족하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쾌락을 누리면 만족할까요? 인간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쾌락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참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얻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가치를 얻기 전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허망함과 무의미함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참 만족과 행복이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 앞에서 늘 좌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내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습니다.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 의사 앞에 않았습니다. 의사가 말합니다. “암 말기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해 드릴 수 이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하는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대는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행복을 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우리의 배를 채워줄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결핍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채워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고 길을 잘못 들어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그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길/ 박진영 작사, 작곡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이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 이 길의 끝에서 내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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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는 그 길에서 이탈하여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요한복음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잔치를 잔치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결핍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그 무엇이 결핍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예수가 오시면 우리 인생의 결핍의 문제가 해결되어 행복과 만족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당대의 남부럽지 않는 재력과 권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윤리적 삶에 있어서도 성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재력과 권력으로도 해결되지 못한 자신의 문제, 뿐만 아니라 자신 종교적인 열심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었던 결핍의 문제 가운데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의 문제는 거듭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나는 길은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우물을 찾았던 수가성의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남자를 5명이나 알았고 지금 6번째 남자와 동거 중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만족시켜줄 누군가를 찾았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삶의 갈증의 문제 가운데 있던 사람입니다. 그녀가 우물가를 찾았던 것을 바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인간들의 갈증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수고하여 먹는 그 우물은 잠시 동안 너의 갈증상태를 해결할지 모르지는 결국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은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 같아서 네가 다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예수가 바로 그 생수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발견하자 자신의 갈증 상태를 채우고자 붙잡았던 물통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메시야를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또 4장에는 이어서 왕의 신하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려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무엇이 부족하여 예수님을 찾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아들의 죽음의 문제 앞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물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시고 말씀으로 그의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누가 나옵니까?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 있습니다. 그는 천사가 내려와 우물을 동하게 할 때 그 속에 첫 번째로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소망을 가지고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헛된 소망이었습니다. 천가가 내려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곳에 첫 번째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 자신을 그곳에 첫 번째로 넣어줄 것을 기대하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며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자신의 질병의 문제, 즉 결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가셨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38년 동안 주저앉아 있던 그가 일어났고 자신을 묵고 있었던 삶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6장에 들어서서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체험하면서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다윗왕때의 태평성대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이 기대하고 소망하던 것을 예수를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만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너희가 원하는 세상의 떡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대부분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자신들이 원하고 기대하던 것을 채워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떠남은 나중에 분노로 바뀌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까지 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 삶의 문제가 떡에 대한 것이라면 어쩌면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떡을 주었을 것입니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문제는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지요.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먹었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의 문제가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9-50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최근 한국사회는 모든 문제가 경제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현 정부가 얼마나 국민들의 생활 씀씀이를 좋게 했는가를 평가하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경제 민주화’ ‘창조경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처럼 되었습니다. 경제가 좋아지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리더라면 우리의 왕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는데 있습니다.
아버지가 돈만 잘 벌어다 준다고 그 가정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는 부모의 따듯한 보살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중요한지 모릅니다. 돈만 많은 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와 같습니다. 돈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행한 것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도 사랑받지 못한 것도 다 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미련함이 우리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세상에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생명과 돈을 바꾸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흔들어도 절대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가치는 절대적이어서 시간의 흐름이나 장소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가치는 이 세상의 가치 가운데 가장 상위에 있는 가치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으면 다 얻은 것이지만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보여주시면서 봐라 내가 너희에게 떡을 준 것처럼, 내가 주는 생명을 먹고 마시면 너희가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말씀이 어렵다고 하여 다 떠나버립니다
.
66절을 보시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왜일까요? 생명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돈이 무엇이며 권력이 무엇입니까? 아무 의미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예수를 통하여 얻을 때만이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타는 목마름은 물을 마실 때만 해갈됩니다. 고기나 생선을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기 전까지는 우리의 영혼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 결핍의 상태를 채우고자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노력하고 애쓴 만큼 더 괴로워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6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육적인 것,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추구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토록 추구하는 돈과 명예와 쾌락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은 너희를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대부분이 사람들이 예수를 떠납니다. 예수께서 생명을 주신다고 하니까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참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눈에 보여지는 것들에 눈이 멀어 그것을 쫒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12명의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가 예수께 나온 것이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들을 이루기 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크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의 떡과 세상의 떡을 함께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세상의 떡으로도 만족하고 하늘의 떡으로도 만족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최종 선택은 늘 하나님이냐? 돈이야?입니다.
나의 유익을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것인가? 그것인 우리의 최종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어떻게 선택하셨고 어느 길에 서 있으며 또 어디로 가길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주는 세상의 떡을 선택하시겠습나까?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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