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30. 하나님의 타이밍/2016.10.9
요한복음 7:1-9
1.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지혜 중에 하나는 때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때를 잘 만나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때를 알기위해 무당을 찾아가거나 사주팔자를 봅니다. 이사나 개업 또는 혼례를 하여도 손없는 날을 택해서 합니다. 손없는 날이란 예부터 악귀가 돌아다니지 않아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날을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언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내가 계획한 일들을 언제 실행에 옮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결혼의 시기는 언제가 좋을지, 사업 확장의 적절한 타이밍은 언제일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한다면 언제가 좋을지, 인생의 수많은 고민들이 바로 ‘때(타이밍)’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6절에 보면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또 8절에도 보면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 때를 분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간적 배경이 언제입니까? 2절에 보니까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 시점입니다. 초막절은 유대민족이 반드시 지켜야 되는 3대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초막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행되는 시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절기는 유대인들이 추수의 기쁨을 감사하는 가운데 출애굽 이후 광야 여행에서 장막에 거주했던 생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 벡성은 그들을 존재하게 했던 과거의 역사 곧 출애굽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점철되었던 광야 여행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기가 되면 사방각지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중심으로 모여 나뭇가지로 장막을 만들어 놓고 7일 동안의 축제를 벌이게 됩니다.
우리도 추석이 가까워 오면 명절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때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명절분위기로 들썩이게 됩니다.
다음으로 장소적배경이 어디입니까?
1절에 보니까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이스라엘의 북쪽인 갈릴리 지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셨다고”하는데 “그 후에”라는 것은 6장의 사건이 있고난 후라는 것입니다. 6장의 사건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을 먹고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지요.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만 너희가 영생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이 어렵다며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 곁에는 12명의 제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언제 있었는가 하면 유월절에 있었습니다. 6장 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초막절이 되었으니까 6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인 것입니다. 유월절로부터 초막절은 6개월 후인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12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고 제자로 양육하는데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4형제 중 장남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마리의 몸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형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있는데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명절에 유대에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들이 누구일까? 6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며 떠났던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줌으로 설득하여 다시금 인기와 명성을 되찾으라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4절을 보면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 말은 걸출한 능력을 이곳 시골에서 감추지 말고 대중들에게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초막절이 되어 사람들이 엄청난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여 있으니 그곳에 가서 너의 능력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추종할 것이고 실추되었던 인기와 명성은 다시 회복될 것이며 이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너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할 것이아니냐는 것입니다.
자, 지금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판단 기준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성공할 수 있는 적당한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즉 예수의 형제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보여주는 “때”에 대한 판단기준이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먼저 그들은 크기와 숫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크고 화려하고 많은 것들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때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때를 분별할 때 판단기준이 그렇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판단합니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해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라면 그래서 내가 더 화려해지고 빛날 수 있는 그때를 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들이 선택하는 적절한 “때” 즉 타이밍에 대한 판단기준입니다.
만일 시골에서 목회하는 어떤 목사님이 계신다고 해봅시다. 그 목사님은 설교도 잘하고 또 기도의 능력도 있어 시골교회를 부흥시킨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모시고 싶다는 스카웃 제안이 들어온 것입니다. 과연 이 목사님은 어떻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능력이 출중한 회사원이 있습니다. 연봉이 높은 대기업 회사에서 스카웃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과연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이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곳, 더 높은 연봉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 한는 판단기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그와 같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형제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형제들 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과 판단기준을 가지고 어떠한 것을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선택하시는 “때(타이밍)”의 판단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때에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할 때 “때”라는 단어의 원어를 보면 “카이로스”입니다. 성경에서는 시간을 둘로 구분하고 있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루 24시간 일연 365일과 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목적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것은 창조주의 계획과 목적가운데 있습니다. 건물하나를 지어도 사용용도에 맞게 설계도면을 그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창조하셨을 때도 그분의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내 뜻과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거나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 그리고 다시 이 땅에 오시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시간표,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에 정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은 카이로스에 이루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4:4-5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죽으심도 카이로스에 이루어졌습니다.
디모데전서 2:6
(현대인의 성경)그리스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바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약속을 이루신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다시 오심도 카이로스에 이루어집니다.
디모데전서 6:14-15
(현대인의 성경)
1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는 이 명령을 잘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시오.
15.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시고 유일한 전능자이시며 모든 왕과 주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카이스로에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사셨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순종하며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를 조절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왜 갈릴리에 계속 머물고 계셨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고 또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동안에 세우겠다고 함으로 그들이 생명처럼 여겼던 성전을 모독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인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가 유대지역으로 오면 그를 붙잡아 죽일 것을 모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언제가 그들이 손에 잡혀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내 때”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 요한복음 13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제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때를 분별하시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세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어떠한 결정을 하실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얻을 유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차이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며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로마서 12장 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라는 이 시대의 풍조를 말합니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물질만능주의이며 쾌락주의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자신들의 눈앞의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편법과 불법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는 첫 번째 삶의 자세입니다.
두 번째로 어떠한 일을 진행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완벽하게 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정과 순종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 순간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그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기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늘 이 기도를 드리셨던 것이기에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대하여 열정을 가지고 있고 또한 온전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때를 분별하는 분별력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답을 찾지 말고 한발 한발 주님과 함께 걷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앞당기려 하지 말고, 조바심 내지 말고, 몸부림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통해 그 때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당한 때에 대한 분별입니다.
세 번째, 주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려고 할 때에 가장 방해되는 요소가 바로 주변 사람들입니다. 주변사람들의 말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데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위해 살 수 밖에 없죠. 하나님의 타이밍이 아니라 남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사람 때문에 불순종을 선택하면 당장 눈앞에 거북하고 불편한 갈등을 피할 수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목적과 방향, 자기 자신마저 잃고 말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잠잠히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결혼에서 13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주변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저희부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서 였습니다. 그래서 의료적인 도움으로 충분히 아이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가운데 입양에 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와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가장 적당할 때가 언제일지를 늘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작년에 의료적인 도움으로 아이를 가질 것인지 아니면 입양할 것인지에 대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음은 입양하는 것으로 점점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입양이라는 것이 인생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무언가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얼마동안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기간이 끝나고 이제 결정해야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입양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꿈에 아기를 보여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노인을 보여주세요. 물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이러한 과정이 없이도 선명하게 그 분의 뜻과 때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는 뚜렷한 확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와 무슨 대화를 하다가 별스럽지 않게 “어제 잘 잤어? 좋은 꿈 꿨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는데 아내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낫는 듯 얼굴이 감격에 젖어서 “어제 꿈에 아기를 보았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까운을 입은 어떤 분이 아기를 안고 오는데 그 뒤로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더랍니다. 제 아내에게 다가오더니 그 아기를 안겨주더랍니다.
그 길로 저희는 입양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희수를 가슴으로 낳게 되었습니다.
저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알려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일을 통해 하나님 뜻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과 환경에 떠밀려 가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한걸음씩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불확실하고 모호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은 늘 우리의 기대이상이셨고 완벽하셨습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동행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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