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31.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2016.10.16
요한복음 7:10-24
10.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목적과 용도가 있습니다. 여기 있는 컵은 물을 담고 먹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졌고 마이크는 소리를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질 때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컵이 깨어져 물을 먹지 못하게 되거나 마이크가 소리를 내지 못하면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적대로 쓰임 받지 못하므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목적을 알고 목적대로 살아가면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무가치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인생의 목적을 이렇게 잘 정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소요리문답 제1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내 자신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것을 내 자신의 기쁨으로 삶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목적대로 살아갈 때 우리 인생이 가치있어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온전히 하나님의 목적에 붙들려 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의 유익이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분의 삶은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으로까지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으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삶을 사셨고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침내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으로 그의 생이 끝이 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고 지극히 높이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까지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 앞에 무릎 끓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때 가장 가치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살피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자세,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세를 배우고 우리의 삶도 그분을 닮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시간계획표에 맞추어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삶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의식은 늘 카이로스에 고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라고 했을 때 움직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던 예수님은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은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룹니다. 그들은 일주일동안 나뭇가지로 텐트를 치고 살면서 초막절의 축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성전 주변과 뜰에는 시간에 맞추어 불 축제며 물 깃는 의식이 진행이 되고, 또 곳곳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랍비들은 곳곳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고 사람들은 그들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들의 교훈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과 무리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관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그동안의 사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을 알고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오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을 빌미로 하여 체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예수가 성전근처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예수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면서 찾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이렇게 유대인들로 지명되는 종교지도자들과 관원들은 예수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랍비들이 하듯이 성전의 뜰 한곳에서 가르침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과 그의 말씀이 궁금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를 찾는 유대인들도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일까? 아마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굉장히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탁월했고 다른 랍비(선생)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랍비들은 구약성경을 자신들의 선생들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또 어떻게 가르칠까를 훈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르침에 있어 훈련받은 전문인이었습니다. 간혹 TV를 통해 강의를 탁월하게 하는 명강사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연구하고 공부한 것들을 재미있고 쉽게 청중들에게 전달합니다. 그것은 다양한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랍비들도 그런 종류의 사람들로 구약의 율법을 가르쳤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다 깊고 심도 있게 가르치는 랍비일수록 탁월함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그 가르침이 너무나 탁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15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여기서 “글을 아느냐”는 것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느냐는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탁월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끝내자 그것을 들었던 사람들이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들이라 함은 당시 구약의 율법을 필사하거나 연구하여 가르치는 전문 율법학자입니다. 이들은 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게 되는데 14세 때 이미 율법 해석에 통달한 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수련을 쌓아 40세가 되어 안수를 받아야 정식 서기관이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율법에 있어서는 서기관보다 탁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기관들이 랍비 즉 존경받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생전 처음 접해 보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학식과 지혜는 서기관들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6절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1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고 그 지혜가 탁했던 것은 당시 서기관들처럼 자신들이 연구하고 깨달을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나의 가르침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당시 율법교사나 서기관들은 어떤 가르침을 할 때 그 내용이 얼마만큼 사실이고 확실한지에 대한 근거를 당시 존경하는 탁월한 랍비들에게서 찾았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어느 랍비가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고 인용함으로 자신의 가르침의 권위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저명한 학자의 글을 인용함으로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은 스스로 연구하고 깨달은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교훈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동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만 하였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들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 알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행동입니다. 회개라는 것이 원어로 ‘메타노이아’인데 이것은 방향전환이라는 의미입니다. 단지 나의 과거를 후회하고 눈물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삶을 완전히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입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입니까?” 일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자신을 위한 삶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율법을 연구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을까 하여 율법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연구하면 어떤 결과가 생겨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하겠죠.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긴관들에게 어떤 결과가 생겼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너희에게 진정한 안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로서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냐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진정한 안식은 너희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찾아오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주신 법이었습니다. 즉 안식일의 원래의 의미는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안식이 찾아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자 예수가 안식일을 어겼다고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9절 이하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19.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자들이 율법을 연구하여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율법을 지키고자 했는데 도리어 하나님 뜻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정확하게 직적하십니다.
17-18절을 보시면,
“17.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 연구나 종교적 행위 전부가 자신의 영광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율법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종교적 행위를 자랑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통해 세가지 결론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 뜻에 대하여 완전한 순종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세요. 들어보고 괜찮으면 하겠습니다. 또는 절충하여 하겠습니다 라는 자세는 바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하나님의 신뢰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뢰하며 보이자 않는 나의 앞길을 순종함으로 한걸음 내딪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 뜻을 알려고 한다면 먼저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단지 지적 호기심이나 그 밖에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목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영어 공부의 목적은 영어로 말하고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영을 배우는 목적은 수영을 하려는데 있습니다. 골프를 배우는 목적은 골프를 치는 것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배우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우리의 삶이 가치있어 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 성경을 공부하면 우리의 결론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살기 원하실까? 성경을 통해 공부해 보면 그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해 보면,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우리가 따라갈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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