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0-26 16:39

요한복음 강해 32. 타협할 수 없는 진리

joywoo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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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32. 타협할 수 없는 진리/2016.10.23

 

요한복음 7:25-36
25.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요한복음 강해 3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과 예루살렘에 거주민들과의 논쟁의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몇 종류의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이 등장하죠(15절).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관원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무리들이 나옵니다(20절). 이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면 호의적이 되었다가도 또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적대감을 가지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명절이 되어 이스라엘지역 방방곳곳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과는 구별됩니다. 
예루살렘은 당시 정치. 문화, 경제, 종교 등 이스라엘 사회전반에 걸쳐 중심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행보는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사람들은 더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이적들과 말씀들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예수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하면, 과연 예수의 말이 사실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의 랍비들처럼 탁월한 가르침이나 교훈 정도였다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기적들도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예수님 이전에도 있어왔고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예수가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은 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함 받겠습니까? 대통령이 하겠습니까? 아니면 대법관이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만이 하셔야 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들었던 사람들은 굉장한 충격에 빠진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예수가 신성모독을 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가 했던 말 중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일관되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두 가지의 가능성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던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이어서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만약에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그의 말을 무시하고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두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고 행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으며 겸손함과 온유함과 지극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예수님을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로 취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자니 모든 것이 자신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 그리스도는 그렇게 초라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다윗왕 때의 태평성대를 이루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초라한 외모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나타남은 신비스러워야 합니다.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모를 정도의 신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4절 보시면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27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유대인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그 결과 다양한 종류의 반응들이 나오는데, 예수는 귀신들린 사람이다. 20절에 보면 “당신은 귀신 들렸도다.” 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도 사람들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적을 베푼다고 말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미혹하는 거짓선지자로 취급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이미 모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말과 행동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오면 체포하여 결국 죽일 것이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 예수가 명절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그 예수가 아직도 저렇게 활보하고 있고 사람들 앞에서 가르침을 하고 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입니다. 저 사람을 잡아서 죽이겠다고 했는데 멀쩡히 살아서 가르치고 있으니 그들이 불만이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자를 그냥 둘 수 있는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이들은 예수님의 등장에 굉장히 흥분해 있고 감정적인 상태인 듯 보입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감정적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그렇게 배척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셨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고 결국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주장처럼, 예수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또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세우겠다고 하심으로 성전을 모독하였고,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안식일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먼저는 그것에 대한 진지하여 고민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무조건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과연 그러한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답답한 심경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4절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우리는 2천년전 역사의 무대 가운데 등장했던 예수라는 한 인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이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공자나 석가처럼 인생의 훌륭한 가르침과 교훈을 남기고 가셨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배척하는 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예루살렘 사람들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기원이 신비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퍼져있던 메시야에 대한 민간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전혀 구약성경의 예언과는 다릅니다. 구약성경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했지만 그들은 성경보다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참되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표현이므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입니다. 참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주만물이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십니다. 모든 것들을 시작이 있지만 예수님은 시작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아십니다.
골로새서 1:15-17
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보면 인간의 지혜와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 지혜와 경험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이해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셨습니다(요10:30).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초월하는 내용들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 않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해보면,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은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세상에서는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고, 14장에 가면 하나님께 구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데 인간의 머릿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경험 세계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초월적인 지식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또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면 죄인들이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35.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자 이와같이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선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력은 왜곡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오염되어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어서 선과 악의 기준이 나에게 있고 옳고 그름의 기준에 나에게 있습니다. 나에게 유익되면 선이고 그렇지 못하면 악입니다. 모든 판단의 근거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도 자기의 판단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나에게 유익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힘이 되어 주는 말씀에 밑줄을 긋습니다. 나의 죄악 된 모습을 들추어내고 지적하는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죄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불교처럼 고상한 가르침을 듣고 깨닫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해탈에 이르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는 힌두교처럼 자기를 수양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진리도 받아들여 믿는 신앙입니다. 2천년전에 이 땅에 오셔서 3년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사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적 열정과 노력들은 모두 종교인들이 하는 것도 같으며 헛된 것입니다. 종교생활이 하나로 불교나 천주교처럼 기독교를 선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자신들이 선해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구제하고 봉사하고 착한일을 많이 하면 좀더 고상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앞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은 그것은 모두 헛된 수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진리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 기독교가 변질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타협하자고 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다 진리가 있으니까 서로 협력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리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함이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모여 그분을 예배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정말로 예수를 나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의 말씀을 통해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말한 예수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가 어떤분인지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사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