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34.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2016.11.6
요한복음 7:40-52
40.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5.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강해 34번째 시간으로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말(언어)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음성입니다. 이것은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주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지구상 모든 인류는 언어를 가지지 않은 경우가 없고, 한편 아무리 고등한 유인원이라고 할지라도 인류와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침팬지의 새끼를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같은 환경에서 길러 보았으나 인간과는 달리 침팬지는 언어를 습득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가지지 않은 언어습득의 선천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교적 기능이 발달하지 않은 유아기에, 그리고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정식 언어교육도 없이, 또한 지능의 차이에도 관계없이 언어를 습득하는 보편적 사실로 보아 선천적인 언어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두산백과 인용).
하나님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언어능력을 주신 것은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 그리고 느낌 등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나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또 안다고 하여도 왜곡하여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것은 그것을 말로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 또는 언어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따라서 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를 유치원아이들에게 설명할 때는 그들이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빠가 엄마에게 아기씨를 주어서 그 씨가 엄마뱃속에서 자라서 아기가 네가 태어났단다.”
엄마의 이 말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랐을 때는 생명이 탄생한 그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과정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고 그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그것은 생명의 탄생을 유치원아이에게 설명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경험세계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본적이 없고, 들어본 적이 없고, 만져본 적이 없는 그 세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중에 하나가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이런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은 마치 좋은 씨를 밭에 뿌린 것과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심은 겨자씨와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마치 이 세상에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심으로 그것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다고 말합니다(창1).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가을이 되면 낙엽들이 물들고 마침내 떨어집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나무는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또다시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지 않습니까? 마치 봄처럼 영롱한 유초청소년 시기와 여름처럼 푸르른 청년시기, 가을처럼 완연하고 푸근한 성인시기 그리고 겨울처럼 앙상한 죽음의 시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이 부활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씨앗이 심겨져 살아나는 것에 비유합니다(고전15:36). 자연의 섭리를 통해 인간의 부활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씨앗이 땅에 심겨져 죽어야만 생명이 살아나는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리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15:42)
자연의 질서 안에 부활의 진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반드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씨앗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사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남자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과 생선을 주시고 12광주리가 남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실 때만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식인종도 아니고 어떻게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이 어렵다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는 것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실까? 오늘 성찬식이 있어 여러분들이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올 때까지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을까?
피조세계에서 생명을 얻는 방식은 어떤 것의 죽음을 통하여 얻게 됩니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을 먹을 때 그것을 죽이는 방식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죽음으로 내 입에 들어와 소화되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생명력을 줍니다. 즉 우리가 생명을 공급받고 유지하는 방식은 다른 어떤 것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얻는 방식이 바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주 강력하죠.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성찬식에서 떡과 포주를 먹을 때 무엇을 기념하는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영생을 얻었는데 그것이 지금 먹어 삼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굉장히 강력한 방식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인식과 경험 세계를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우리에게 설명하길 원하셨고 그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길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7장에는 어떠한 기적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특히 초막절이라는 명절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에 주목합니다. 정확히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전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에게 대하여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윤리적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기 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의 말씀 중 몇 가지를 들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을 들었고 그렇게 알 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1:24절의 말씀으로 사람사이에 싸움이 있었을 때 판결하는 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만일 사람사이에 싸움이 생겨 상대방의 눈을 상하게 했으면 동일하게 가해자의 눈을 상하게 하여 그 싸움을 종식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 된 본성 때문에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눈은 눈으로 갚지 않습니다. 눈을 맞으면 눈뿐만 아니라 죽도록 패야 성이 풀립니다.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대 때리고 도방가면 쫒아가서 두 대 세대 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주심으로 싸움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수천 년 동안 지켜오던 법을 어느 날 한 청년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5:38-39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잘 보십시오. 산상수훈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윤리적인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네가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을 이중으로 모독하는 행위이지만 네가 그것을 넉넉함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만 보아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 살아가는 삶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악한 자가 없고 우리의 오른편 뺨을 치는 자도 없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굉장히 충격적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반응을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15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여러분! 어떻게 30대 초반의 청년이 이러한 놀라운 가르침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구약의 율법을 허물고 – 물론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었지만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면서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을 한 인간이 마치 반박하는 듯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율법의 의미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권위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만 어떠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상 그 누구도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네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배우지 않고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산상수훈의 한 구절을 말씀드렸지만,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하면서 7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확신 있게 말씀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한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갔다 왔거나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게 왔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국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고 미국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28절 후반-29절
“28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여러분, 이 세 구절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은 하나님의 교훈, 즉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나를 보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말씀하시고 다시 하나님 나라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들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분의 말이 굉장히 놀랍고 기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관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예수를 잡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막절 명절에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들은 듣게 됩니다. 아마 이들도 예수가 거짓선지자로서 백성을 미혹시키는 사람이라는 편견과 오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에 압도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을 파견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이 어찌하여 예수를 잡아오지 아니하였냐고 책망합니다. 이때 그들이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46절입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자신들도 예수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고 반드시 잡아야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말을 들어보니까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이 그동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문으로 직역하면 이런 말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상 아직까지 그러한 말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들입니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고 내 말이 하나님의 말이라고 하고 또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요. 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는 믿는 자는 성경에서 기록된 것처럼, 생수가 반석에서 나오고, 성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생명수에 대한 이미지를 예수님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누구도 구약의 에덴에서부터 흘러나온 그 강줄기,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말라 죽어갈 때 반석에서 흘러나온 그 물, 그리고 에스겔이 환상가운데서 보았던 성소에서 나온 그 물, 그리고 스가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날 예루살렘에서 터져나오는 생명수, 그리고 마침내 새하늘과 새땅에서 모든 죽어있는 생명을 살려내는 생명수의 강,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모형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생명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가니 너희 목마른 영혼들아 와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가운데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고 또 이러한 말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을 여러 곳에서 소개합니다.
1.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요한복음 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3.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4.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5.요한복음 15:5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요한복음 17:24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직접 들었던 관원들이 그 말씀가운데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나타난 여러 가지 반응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다. 그 선지자라는 것은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하고 구약성경에 기록하기를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다고 하고, 이러면서 43절에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질 때 반드시 분열을 초래합니다. 그냥 듣기 좋은 교훈이나 가르침이라면 분열될 일이 없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공자나 석가처럼 윤리적인 가르침이라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면 반드시 분열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51-53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결코 타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맘몬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조상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배하지 않을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신앙적 태도에 대해 조금 양보하라고 하고 타협하자고 하는 사람과는 분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분쟁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하고 양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입장이 되어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신비스럽고 기이한 일들을 언어라는 제한적인 틀 안에 다 담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눈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 있었고 우리의 귀는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닫혔던 귀를 여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리게 하셨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울 때에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하나님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내 경험과 인식의 틀이 깨어지고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가진 생각과 인식의 프레임이 깨어질 때 비로서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가진 가치관이 깨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새로워지면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것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내가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며, 내가 소유한 작은 것들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임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인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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