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18-05-15 17:01

<가정의 달 설교>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가정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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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가정

 

에베소서 5:31-32
31.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 땅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유일한 공동체는 가족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남녀가 만나 이룬 가정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을 보시면서 기뻐하셨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아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을 창조하실 수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아담을 돕는 배필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아담을 처음부터 불완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창조하사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 완전함을 이룰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결혼과 출생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루 가정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힘들고 어려운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결혼하지 않고 살면 오히려 편할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식을 낳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을 더욱 독립적으로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이루면서 말입니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여성들은 더 그렇지 않습니까? 결혼하면 나타나는 현상, “미치거나 아프거나”(이화여대 백소영교수가 한국 여성의 현실을 언급한 키워드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데서 느끼는 아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서 오는 아픔, 때로는 자녀를 키우면서 깨닫게 되는 자신의 연약함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들 속에서 때로는 내 인생이 뭔가 하는 좌절감.


여기계신 우리 어머니들, 꿈도 있었고 하고 싶은 것들도 많았지만, 그것들 포기하고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물론 여성들만 이러한 포기와 헌신이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여성들만큼은 아니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남성들도 많은 포기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결혼도 힘든 것이고 자식 낳아 키우는 것도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불완전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낳아 양육함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질서를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31.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왜 이것이 비밀일까요? 그리고 이 비밀이 크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비밀은 숨겨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정 속에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큰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큽니다. 이 큰 비밀은 결혼을 하여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고, 또 자식을 낳아 엄마, 아빠가 되어 살아가면서 조금씩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비밀로 숨겨져 있었는데 가정을 통하여, 그러니까 남편역할, 아버지역할을 하면서 또는 아내역할, 엄마 역할을 하면서 그 숨겨진 그리스와 교회의 관계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남편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가운데 심겨놓으신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요?
먼저 오늘 본문이 어떤 맥락에서 주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1장에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결론 부분에 와서 그렇다면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분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할 때,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5장 17절을 보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하시면서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리고 성령충만한 삶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찬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여 피차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종의 현장이 어디인가라고 할 때 가장먼저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부터 33절 까지가 성령충만한 삶의 가장 우선되는 현장인 가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방언이나 병고침 예언 뜨거운 기도 등을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충만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가정에서 남편을 존중하고 복종하며, 아내를 사랑하고 위하여 희생하는가 하는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충만한 삶이 구현되는 가정속에서 특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속에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비밀로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혼과 가정속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오 교회의 관계의 비밀은 무엇인가?

 

첫째로, 결혼과 가정생활을 통해 피상적이었던 죄의 개념이 구체적이고 체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자기 자신의 인격의 바닥을 보게 되는 경험들을 반복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동안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었는데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아 살다보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또 폭력적이며 분노의 사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깥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나의 죄악 된 본성은 결혼과 가정생활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욕하고 고함을 질렀던 것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폭력적이었던 것도 실수가 아닙니다. 그렇게 죽일 듯 달려들었던 것이 실수가 아닙니다. 또는 상대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감추어져있던 내 안의 죄악이 나온 것입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주 작은 일들이었습니다. 뭐 대단한 것 가지고 분노하고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아내지 못했고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고 용납하지 못했으며 또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은혜스럽게 예배드리는 나도 나이지만, 그때 그렇게 분노했던 나도 나입니다. 다른 내가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죄악된 모습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과 가정을 통해 그것을 들추어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또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내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결혼생활 그리고 자녀양육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죄악을 철저하게 깨닫고 또한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배우자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고 기고만장 했겠습니까?
죄인들이 모여 이룬 것이 가정입니다. 그러니 그 속에 갈등과 싸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드러나는 우리의 죄의 실상들이 결국은 우리를 십자가 앞에 무릎꿇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결혼과 가정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비밀은,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18장 20-22>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먼저는 가정입니다. 그 다음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엇이 이루어져 하는가 바로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15절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그들이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범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22저에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용서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공간은 가정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용서를 베풀고 용서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깨닫게 됩니다.

용서라는 것은 죄를 그냥 덮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로는 죄가 일으킨 결과들,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인 손해를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것에 피해를 본 사람이 죄를 인정하는 가해자를 향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때 피해자는 자신이 받은 물질적, 정신적 또는 정서적 손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즉 용서는 피해자가 받은 상처를 감당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를 구하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지만 용서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에게 또는 자녀들이나 부모님에게 죄를 범하여 살아갑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처는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더 깊이 받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을 대부분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진심이었고 마음이었기 때문임을 알기에 받은 것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바빠서 나를 돌보지 못한 것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대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자식이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실수로 때린 것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 속에 나를 향한 분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곳이 가정이지만, 반면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곳도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인 죄가 원인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도 자녀에게 용서를 구해야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죄로 말미암아 상대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가족 가운데 용서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도 어렵고....
오히려 남들하고는 쉽습니다. 가정에서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식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 가족 간에 용서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까요? 아마도 상처가 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용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나를 향한 무조건적 용서입니다. 나에게 용서가 이렇게 어려운데, 나를 참아내시고 마침내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것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용서하심을 깊이 깨달은 후에 나에게 상처 준 가족을 향하여 용서를 하게 하십니다.

용서는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용서의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가족 간의 용서는 짓눌려 있던 어둠을 물리치고 밝은 빛을 가져옵니다. 용서를 통하여 회복된 가정은 이전보다 더욱 든든한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용서의 원천은 하나님이기에 용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이 더욱 충만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죄를 범할 수도 있지만, 나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상처받은 일도 있지만 상처를 주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통하여 그 가족을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가정속에서 자유함와 기쁨을 경험하길 원하십니다. 
 
용서는 바로 결혼과 가정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이 비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십자가의 용서를 깨닫게 되는 현장은 바로 가정입니다. 

 

세 번째로는 희생과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내고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표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인가 할 때 바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첫 번째 공간은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희생하게 되어있습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서로를 위해 희생하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6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형상이라는 성삼위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 안에는 성삼위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면 조금씩 그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공동체로를 통하여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누리신 그 사랑을 우리에게도 나누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고귀하고 아름답기에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사 누기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과 출산 그리고 가정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가장 큰 축복은 사랑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희생과 섬김을 통해 누려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희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드러내십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희생을 담담히 감당하시었습니다.
우리를 구원을 보면 성삼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랑을 나누고 계신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통한 하나님은 그 영광으로 충만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도 나누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이를 통해 출생하게 하심으로 가족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시면 문제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 하나씩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가정에 평안과 안식과 기쁨이 깃들 수 있는가?
그것은 희생적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서로를 위하여 자신의 것들을 내어줄 때 가정에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 것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갈등과 분열과 싸움의 연속일 뿐입니다.

고전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것을 주는 것입니다. 즉 희생입니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 물질 등을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나의 행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말합니다. 참는 것도 희생입니다.

 

<제가 최근에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좋은 말이 있습니다.
아내와 텔레비전을 보는데 연예인 부부의 일상적 삶을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벤트를 준비한 것입니다. 고급진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중간에 준비한 귀걸이를 선물을 하고 또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보통 아내들 같으면 그런 것 보면 당신도 나한테 저렇게 좀 해봐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 아내는, “당신은 나한테 절대 저런거 하지마. 난 저런 걸로 별로 감동받지 않아.
그동안 당신이 우리 아빠 아플 때 먼 길 마다하지 않고 가준 거,
부모님 이사할 집 구해주고 이사시켜 준 것,
내가 힘들 때 손잡아 준 것, 그게 나한테는 최고의 이벤트였어.“
그 말을 들으니까 되게 기분 좋더라고요.>

 

우리의 희생은 너무 일상화가 되어 있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서운함 보다는 먼저, 나를 위해 희생한 사랑에 대하여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의식하고 기억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희생적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중에 아주 작은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고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도 희생의 분량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많이 자신을 상대방을 위해 내어줄 때 우리는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과 가정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나의 죄악된 모습들과 그것에 대한 용서 그리고 희생적 사랑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훈련의 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에서 되어지면 그 향기가 확장되어 교회와 사회속에 퍼저나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이 우리 가정에서 체험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