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22-33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고린도전서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가정 창설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가정을 허락하셨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가정을 통해 행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행하기도 합니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하고 좋은데, 왜 하나님은 굳이 가정으로 사람을 묶어 두시는지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완벽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몸을 이루게 하심으로 가정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부족한 두 사람의 연합을 통해 무언가를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가정을 창설하신 하나님의 뜻은 행복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가정의 목적을 행복으로 생각하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정을 통해 행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불행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남편 또는 아내를 질병으로 인해 먼저 천국으로 보낸 분들도 있고 자녀들의 연약함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부모님들도 계십니다. 부부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정은 결국 가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는 훈련으로 가정을 창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존재합니다. 천국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이 없습니다.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없습니다. 모두가 형제와 자매입니다.
이 땅에서만 한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가정을 이루고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를 배우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속에서 우리를 성숙시키는 훈련의 장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남편과 아내의 서로 존경하고 희생하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다가 32절을 보시면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디서부터 배우는가? 바로 가정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가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는 곳이기도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부사이의 사랑의 근거가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 5:22-23>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4절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자발적 순종하는 모습을 어디에서 실천되어야 하는가? 바로 가정에서 부터라는 것입니다.
또한
<엡 5: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의 모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그 희생적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죠.
이것은 단지 아내와 남편의 사랑에 복종과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가정생활의 근거가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6장에 자녀와 부모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되는데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가? 주님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부부관계이든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근간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향한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게 하시는 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창설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이 가정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아도 오래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 오래 참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합니다. 가정이 아니라면 이런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다른 관계들은 오래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관계를 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다릅니다.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아직 육아 초보 아빠지만,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갑니다.
머리로만 알지만, 사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참아야 하는 것, 그것도 오래 참아야 하는 것을 저는 희수를 양육하며 배워갑니다.
성경은 사랑할 때 오래 참아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데 오래 참을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랑해야 될 대상이 연약하고 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나는 사랑을 주는데 계속해서 실망시키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때로는 실망을 넘어서 절망케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사랑이 미욱하고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때문에 그 사랑이 이타적 사랑으로 성숙하기 까지 오래 참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해 주는 것 보다 오래 참아주는 것이 사랑임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면서 기대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위해 일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자녀들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외에 그리고 그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가장 먼저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는 것 외에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그것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했던 우리를 참아 주셨습니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었던 지난 시절의 죄악 된 모습을 참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돌이킬 때가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부여잡고 기도하셨습니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자식이 재산을 요구하고 집을 나갔을 때 그것을 허용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권위를 사용하여 아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버젓이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하는 패역한 아들을 때리고 가둘 수도 있었습니다. 집을 나가 재산을 낭비하고 허랑방탕하게 살아갈 때에 종들을 시켜 잡아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음이 떠난 아들을 그렇게 해서 묶어 두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아들이 집나간 그 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오래참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울 채우며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구나. 그것은 아버지 입에 있는 풍요함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음이 가장 큰 행복이구나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를 맞이해 주었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집 나간 아들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격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강압하거나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다고 목이 곧고 뻣뻣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오래 참고 인내하는 사랑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도 죄인인 우리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의 사랑스런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할 때도 참으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음에도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롯유다가 예수를 팔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을 때에도 그의 행동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부활이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네가 왜 나를 부인했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고백은 마음을 다해 토해내는 진실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으로 그 사랑을 보이신 예수님께 그는 굴복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권을 그리스도에게 맡깁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항복이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오래 참는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참는 것은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억제된 감정은 또 다른 분노의 형태로 표현될 것입니다.
참는 것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분을 통해 변화시킬 내 앞의 사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잠잠히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적극적인 행동도 없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적극적이 행동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남편 또는 아내를 그리고 사랑스런 자녀들을 세워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대이상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내가 바라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오래참게 할 것입니다.
온유한 것, 시기하지 않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 교만하지 않는 것,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러한 모습들을 배우고 실천하는 훈련의 장이 가정입니다.
다른 곳에서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아기를 보는 것 보다 밭일 하는 것이 쉽죠.
저의 경우 남편역할 아빠 역할 보다 목사 일이 쉽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가정에서 우리의 역할입니다.
바깥에서는 좋은 사장님이고 부장님일지도 모르지만 가정에서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에서 신실한 권사님 집사님일지는 모르지만 가정에서 신실한 아내이고 신실한 엄마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정에서 우리의 모습이 진짜입니다. 바깥에서 보여지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진짜 우리가 아닙니다. 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가면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은 아닙니다. 가정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진짜 나입니다.
만일 제 설교에 제 아내나 아이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성공한 설교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선순위에 있어서 가정을 최상위에 둡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목사도 되고 장로도 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감독의 자격, 오늘날로 하면 목사의 자격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2절),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4,5절)”
그러면 목사만 그러한가?
디모데전서 3장 13절에 집사의 자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가정에서 잘하는 사람이 교회일도 잘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자들로 만들어 가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사랑을 가정에서 실천하고,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만큼 사랑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절망적인 존재인지, 남편과 아내 노릇하며, 엄마와 아빠 노릇하며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주님을 의지하여 일어서야 합니다.
상처를 준 일이 있으면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구할 때는 용서해 주고, 허물이 있다면 감싸주고 연약함이 있다면 보듬어 주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함의 길이고 그것을 위한 훈련의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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