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19. 훈련을 통해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사사기 6:25-32
25.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27.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8.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31.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32.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심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연약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큰 용사가 되어 주의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기드온은 두려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의심이 많은 자입니다. 자신이 설득되지 전까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확신을 요구하는 그를 인내하며 참아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의 선봉에 세우시고 승리를 이끌어내십니다.
우리는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의 일꾼들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자랑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전쟁의 승리나 놀라운 업적을 남기지만 결코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불러 그의 사역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그들을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두려움의 사람이었지만 미디안 대군을 향해 300명의 군사와 함께 적진으로 돌격해 나갑니다. 그는 더 이상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변화가 가능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시키신 결과였습니다.
두려움의 사람을 담대함의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훈련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5.43
첫 번째는 자신의 집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25-26절입니다.
“25.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당시 기드온 가문에는 우상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 뜰에 바알의 제단이 있고 그 곁에 아세라 목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자신의 아버지가 관리했던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섬겼던 것인데 기드온의 집 마당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기드온 때에 우상을 섬기는 문화가 이스라엘 삶의 중심부까지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조항이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들이 지켜야 할 삶의 원칙과 기준입니다. 이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쓰셔서 모세를 통해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계명은 “너를 위해 어떤 형상으로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배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신을 형상으로 만들까요?
가장 중요한 동기는, 섬기는 신을 상으로 만들어 두며 그 신을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지 못하고 한 곳에 머무르도록 붙잡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신이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모르면 섬기는 사람이 불안해 질 수 있습니다. 여기도 계시도 저기도 계시다면 여기서 섬겨야 할지 저기서 섬겨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한 곳에다 고정시키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도 여기저기 마음대로 나타나도록 하지 말고, 여기 이 자리에 눈에 보이도록 고정시켜 두면 섬기기가 쉬워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장소를 특별히 구별하여 거룩한 장소로 삼고 싶어 하고, 그 신을 섬기는 구별된 사람 또는 거룩한 직분 담당하는 사람이 그 제사의 일을 맡기를 원하고, 그리고 일정한 시간에 모여 제사의 행위를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철학자인 강연안 교수는 로컬리제이션 모티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어디나 계시다고 하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한군데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왔다갔다 하지 마시고 여기 계십시오. 그러면 내가 와서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깊은 의도는 내 마음대로 주물러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매니플레이션 모티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매니플레이션 즉 손으로 마음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풍요와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잡을 수 있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욕망이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왜 전지전능하고 무소 부재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상을 자신의 마당에 세워놓았을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이미 교회안에 이러한 우상숭배가 들어와 있습니다.
화려한 건물을 짓고 그 속에 각종 보석으로 치장한 물건들을 넣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것을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성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물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물건입니다. 강대상이 있는 앞쪽을 제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제단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재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왜 잘못일까요? 우리가 성전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곳만을 거룩한 장소로 구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물로 규정함으로 나머지 내 모든 소유를 내 것으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구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어떠한 것을 구별하는 것과, 내 것과 하나님 것을 구별하여 내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함으로 그것에 십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십의 구가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은 한주의 첫날이며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 구별하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날은 내 맘대로 살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떠한 거룩한 행위들을 자신의 삶의 영역에 하나하나 세우고자 할 때, 그것이 헌금이든 기도든 구제든 금식이든 간에 그것을 하는 이유가 내 삶의 풍요와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동기에서 나왔다면 그것은 내 삶에 바알과 아세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사는 거룩한 직분입니다. 성직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세족적인 일을 합니까?
성직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성과 속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성직입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목사도 거룩하지만, 한밭대 앞의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도 거룩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땅의 한 부분을 청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거룩한 장소, 거룩한 시간, 거룩한 사람을 구별하죠. 왜 그럴까요? 그러한 것을 만들어 놓으면 내 필요에 의해 언제든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컬리제이션과 매니플레이션인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목사가 그러면 안 되지”라고 할 때 나는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평신도이기 때문에...
(최근에 저를 화나게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잘 아는 청년이 퇴사한지 6개월이 되도록 퇴직금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회사의 사장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를 성심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퇴직금을 안주고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헌금은 열심히 드립니다. 여러분! 헌금을 내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퇴직금을 지급하는 것이 먼저입니까? 마땅히 직원들에게 지급할 돈을 주지 않고 드려지는 헌금을 하나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그렇게 섬길 수 있는가?
삶과 신앙이 분리된 것입니다. 직장과 교회가 분리된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삶은 신실한데 직장에서는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도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놓은 우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것을 무너뜨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상, 내 안에 있는 우상을 먼저 부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에게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이일을 진행합니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10명의 종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27절,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이일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바알을 상을 훼파합니다. 바알의 단은 사방이 7-8m에 높이가 1.3m나 되었습니다. 그것도 무거운 진흙으로 고정시킨 형태입니다. 따라서 여러 명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 밤에 기드온은 바알의 단을 헐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아세라 목상을 조각내어 산성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아 7년 된 수소를 올려놓고 번제를 드립니다.
왜 7년 된 수소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를 7년 동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7년 된 수소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속죄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레위기 4:13-15절에 보면 국가적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소를 제물로 드리라고 명합니다. 그 일을 기드온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신 방법은, 미디안의 적진으로 들어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7장 9절에서 15절입니다.
“9.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10.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15.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동안 몇 차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증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두려움 가운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밤에 미디안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십니다. 만일 그것도 두려우면 부하 부라와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부라와 함께 미디안의 진영으로 잠입해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가 보았던 것은 메뚜기의 떼처럼 많은 적군들을 목격합니다. 그때 한쪽에서 들려오는 적군의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꿈을 꿨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의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을 무너뜨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동료병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요아서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기드온은 그곳에서 적군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진멸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때 기드온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곳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올립니다.
그 경배는 적진에서 드려지는 경배였던 것입니다. 15절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우리가 살펴본 두개의 사건 속에서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 기드온에게 동역자들을 붙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알의 단을 헐 때 10명의 종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적진으로 들어갈 때는 부라와 함께 가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맡기실 때 독불장군처럼 홀로 하게 하지 않으시고 함께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기 때문에서 서로가 힘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들이 힘을 모아 서로의 은사들을 사용하여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다 끝낸 후 마지막 단계에서 항상 경배의 행위가 이어졌습니다. 바알의 단을 헐러 아세라 상을 조각낸 후 그것으로 단을 쌓아 그곳에 수소를 올려 경배를 드렸습니다. 적진에서 적군들을 소리를 들은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과연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 후 적진에서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경배의 행위는 목숨을 걸고 하는 경배였던 것입니다.
만일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경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면 두 번째는 자발적인 경배였습니다.
즉 기드온은 처음에는 두려움의 사람이었지만 점차적으로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훈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은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의 일에 함께 할 사역자들을 불어내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을 자랑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연단하시고 훈련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대부분 우리가 약할 때에 불러내십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 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약하게 하사 그분을 찾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부여하시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훈련하십니다.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시편 66: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적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담대한 군사들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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