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26. 진노중에 긍휼을 내리시는 하나님
사사기 10:1-5
1.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사사기 강해 26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아비멜렉과 세겜에 임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셔서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심판의 교리가 상당히 약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영리 전도법의 경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로 시작합니다. 또 축복송으로 가장 많이 불려지는 찬양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사랑은 추상적일뿐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할 때 그 사랑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사랑으로 다가오십니까?
교회 안에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얼마만큼 비참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비참함은 다름 아닌 죄인으로서의 비참함이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죄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이것이 얼마만큼 무서운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복음이 증거 되어질 때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죄인이며 그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마땅한가를 먼저 선포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들려주기 위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이러한 순서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1장부터 시작해서 3장 20절까지 그 누구도 결코 핑계할 수 없도록 모든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게 임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2: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2: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2:5>“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죄와 심판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죄의 비참함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의 비참함의 모습이 단지 인류의 일부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선언합니다. 잠시 보고 오겠습니다.
<로마서 3:10-18>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저는 이 말씀에서 제일 와 닿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죠. 아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이냐 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께서 행여 나를 심판하실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저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교회가 기복주의에 편승하면서 복음을 값싸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면서 가능하면 갈등 없이 쉽게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 진정한 회개 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가뜩이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자신이 가장 가치있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자신의 죄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면 결코 진정한 회개의 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악한 사단의 활동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을 보면, 사단이 최초의 인간을 유혹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중앙의 있는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죠. 그런데 사단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여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교한 사단의 유혹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와가 흔들입니다.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말씀을 약화시켜 버렸습니다.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반드시 죽으리라” 이것은 죽고 또 죽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강조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 창조주의 말씀을 약화시켜버립니다. 그러자 사단이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죽음은 심판입니다.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은 심판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교리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로써 사단이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심판교리를 맨 처음 공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심판하지 않아.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지 않아도 그분은 결코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가 네 삶에 하나님이 되어 네 맘대로 살아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왜 처음부터 이 진리를 공격했을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시작하면 모든 죄를 쉽게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결국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세대는 죄인으로 출생하여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악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 삶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거실에서 책을 보다 방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TV를 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무슨 이야기야? 물었더니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인데 엄마가 암으로 죽으면서 남편과 4남매를 남겨둔 것입니다. 끝 장면을 잠깐 보았는데 화면에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결혼식 장면을 컴퓨터 화면으로 봅니다. 큰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엄마 처음 볼 때 예뻤어?” “누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어?” 아이들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둘째 아이는 지금도 잠을 잘 때 엄마 옷을 끌어않고 냄새 맡으며 잔다고 합니다. 막내는 우리 희수정도 되었더라고요. 그런 거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죠.
어린이집에 차를 타고 나간 아이가 오후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낮잠시간에 잠자지 않고 운다고 원장이 눌러 질식사 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끔찍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이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내 삶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많은 부분이 아마도 이런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과 고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있고 또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아내를 잃은 남편의 입장이 될 수도 있고, 암에 걸려 죽는 아내의 입장도 될 수 있으며 어린나이 엄마를 잃은 아이의 입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내 인생을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죽지 않습니까? 암에 걸리지 않나요? 예수 믿는다고 좋은 일만 생깁니까? 아니죠.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게 꼭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드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드온은 왕 같은 삶을 살았고 왕처럼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때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하지만, 그 기간에 오히려 악함이 더 확장되고 깊어지기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을 때 그것이 얼마나 공의로운가를 나타내십니다.
기드온의 타락은 아비멜렉으로 이어집니다. 첩을 통해 낳은 아들로 인해 70명의 기드온의 아들이 한 반석에서 끔찍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아비멜렉도 여인이 던진 돌에 맞자 죽음으로 기드온 가문이 아애 멸절해 버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그의 악행을 갚으셨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하고 따랐던 세겜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임했습니다.
그들은 요담의 선지자적인 외침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행한 일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냐?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순종하며 살겠다고 맹세한 세겜 땅은 결국 요담의 저주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 절대권력을 누렸던 아비멜렉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형제를 70명이나 한 반석에서 학살하고 세겜사람들을 망대로 몰아 불과 연기로 태워 죽였던 그였습니다. 그렇게 악랄 했던 그가 한 여인이 던진 돌아 맞아 죽은 것입니다. 이 맷돌 위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돌이 아닙니다. 휴대할 수 있는 작은 돌덩이입니다. 그게 어떻게 정확하게 아비멜렉에게 맞았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것은 우리의 지혜와 생각을 초월합니다.
시편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그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시지 않는가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9>
6.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우리는 이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범죄한 자들에게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날로 하면 예배당에 앉아있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중에 하나님을 모르거나,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은 사사기 10장의 내용은 장수로는 9장과 구별되지만 아비멜렉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두 사람의 사사가 아주 짧게 등장하는데 아비멜렉과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10:1>“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이어 등장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라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성경의 인물들은 출신지파와 누구의 아들이라고만 소개되는데 돌라는 출신지파와 함께 3대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가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가문은 결국 아비멜렉때에 멸절되었지만, 잇사갈 사람 도도의 가문은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교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3절의 야일이라는 사사는 어떠합니까?
이번에 그의 아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4절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당시에 나귀를 탔다는 것은 풍요와 안정을 의미합니다. 그의 자녀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기드온의 가문과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과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형제지간에 학살하는 기드온가문과 다르게 이들 아들 30명이 다 각지 성읍을 가지고 나귀를 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와 평강을 누렸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을 남겨두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구원의 일들을 진행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지만 또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과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즉각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을 낳기까지 생명을 연장하셨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백삼십세에 셋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을 통하여 인류를 존속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5장에 들어서면 셋의 셋을 통해 아담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내용인 누가 누구를 낳고 죽었더라입니다. 그러다가 보석처럼 한인물이 등장합니다. 에녹입니다.
창5:21-24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리고 또 한명이 등장합니다.
창5:28-29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그리고 창세기는 6장부터 하나님의 물 심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6:5-8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혜 베풀자를 찾으십니다.
그가 셋이었고 에녹이었고 그리고 노아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홍수심판으로 인해 수장되어질 때 노아와 그의 세아들 그리고 며느리들이 남게 됩니다. 그중에 셈이라는 아들을 통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준비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11장의 내용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가 씨앗처럼 심겨지게 되었고 그것이 여호수아 때에 줄기처럼 자랐습니다.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 왕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는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이사야 11장입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새의 줄기, 즉 다윗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가 결실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를 통하여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이사야는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 가나안땅에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가 뿌린 말씀의 씨앗은 겨자씨 같았으나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그분의 구원받은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온 인류가운데 여전히 임하지만, 그 가운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계보가 이곳에 계신 바로 여러분에게까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우리 후손까지도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또 한편에서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높여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겠습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