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02-13 11:18

사사기 강해 6. 하나님의 백성의 추락과 그 이유

joywoori
댓글 0

하나님의 백성의 추락과 그 이유

 

사사기 1:27-36

27.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우리는 계속해서 사사기의 역사적 서론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패의 역사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사기를 강해하기로 해 놓고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성공적인 삶 보다는 그들의 실수와 실패를 주목한다는 것은 설교자로서 그리 달갑지 많은 않습니다. 그래서 인지 아마도 사사기에 대한 설교가 국내외 적으로 많이 설교되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여섯 번째 시간인데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떠한 치부를 들추어내실지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기가 설교되어져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의 성숙을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 보면 젖을 먹여야 되는 어린아이 성도와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키는 장성한 성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5:12-14>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저는 여러분들이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소화시킬 있다고 판단하기에 사사기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실패의 역사를 통해 우리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내가 배우고 경험한 신앙의 모습이 옳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런데 외국생활 속에서 특별히 뉴질랜드에서 사역하며 또 그곳의 사역자들과 가깝게 교제하면서 저의 신앙의 틀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그들의 신앙생활은 경건의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새벽기도, 수요기도, 금요철야, 특별새벽기도, 부흥회와 같은 것으로 신앙을 유지해 왔던 저에게로서는 이해되지 않았고 때로는 한국교회의 이러한 신앙의 열정을 자랑하고 전파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깨달은 것은 그들에게 우리처럼 경건의 모양은 보여지지 않았지만 경건의 능력은 있었습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국가청렴도 뉴질랜드 90점 세계1/ 우리나라 5352)

 

이에 반해 한국교회에서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열정도 있고 헌신도 있는데 실제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공부를 하지만 실제로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어교육의 열정도 있고 시간도 많이 투자하는데 실제로는 영어를 못합니다. 토익이나 토플 점수는 높은데 실제로 외국바이어와 통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영어공부의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목적이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는 공부방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죠.

 

교회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새신자반, 제자반, 헌신자반 등 교회의 프로그램을 다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합니다.

 

성수대교의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사건, 제천스포츠 센타 화제사건, 밀양세종병원 화제 사건 등,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성장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운데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될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 들어갔을 때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또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진멸하지 않습니다. 쫒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쫒아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후렴구처럼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27, 쫒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9,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이스라엘은 그곳의 주민들을 진멸하지 않고 살려두어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자원을 착취하여 자신의 삶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27절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벧스안이나 다아낙등의 지역은 대부분 무역로에 위치해 있거나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들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주민들을 살려둔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벧세메스와 벧아낫이라는 도시가 등장합니다. “은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라는 의미이고 벳아낫은 아낫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둘다 신전이 있던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도시를 진멸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가나안의 문화에 매료되고 동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항상 신전이라는 것은 돈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무역이 번성한 곳일수록 신전이 화려하고 거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을 가나안의 신들이 다산과 풍요 그리고 안정을 보장해 주는 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신들을 달래고 기분을 좋게 해주면 결국 더 많은 풍요와 안정을 보장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진멸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누린 풍요와 안정을 자신들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들로부터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 보시면 그들을 쫒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노예로 부렸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들로부터 삶의 방식을 배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농사를 어떻게 짖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신을 달래서 비를 내리게 하며, 어떻게 해야 자연재앙을 피하여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지를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이 매혹적이었던 것입니다.

 

40년을 광야에서 헤매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의 문화는 그야말로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것에 눈이 먼 나머지 하나님의 사명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와 돈 그리고 가나안의 삶의 방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간절히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내고 보장받기 위해 만든 것이 우상입니다.

모든 종교가 우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위해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흐르면서 그 대상만이 바뀔 뿐 인간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복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자신이 가진 풍요로움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건강,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 등 이러한 것이 뒷받침 되어질 때만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부분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아이를 낳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이 일을 선택했는데 왜 행복하지 않지?

우리 삶의 모든 목적이 행복으로 설정되어 있으면 언제나 우리는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와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자신이 소유한 풍요에 기반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누리고 있는 가나안의 사람들을 보니까 매료된 것입니다. 그들처럼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본성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행복으로 규정지어지면 당연히 풍요로움을 추구하게 되고 삶은 그것을 얻어내기 위한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경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쟁이 공평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을 금수저로 태어나 50m앞에서 출발하고 어떤 이는 부모를 잘못만나 출발선 50m 뒤에서 출발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출발선에도 서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달리기도 공평한 룰과 잣대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 경쟁하면서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얻어진 행복은 일시적이고 유동적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 것입니다.

그 불안은 잃을 것이 많은 자에게 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며 또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한 우리의 선배들은 소요리문답 1번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자들입니다(고전10:31).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그분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기쁘시게 하기 위해 결혼했는데 이 결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아이를 낳았는데 내 양육방식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나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이것은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도는 성공이 아니라 순종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성도는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풍요로움과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얻어지는 풍요로움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6>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성도들은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복이시고 복의 근원이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나의 삶을 확장하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부분 불행한 이유가 비교와 경쟁 때문아닙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 섬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면 안식과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추락합니다.

처음에는 가나안백성이 그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1: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처음에는 가나안 족속이 그들 가운데 거주하였다고 말하다가

29.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그런데

32절에 역전현상이 나타납니다.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가나안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허용하는 단계에 있다가 나중에는 아예 그것을 쫒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 이러한 역전현상이 우리 삶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인지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지 분간을 못합니다.

 

어느 순간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됩니다.

 

사사기 1장의 역사적 서론은 이렇게 맺어집니다.

36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취한 땅의 경계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땅의 경계를 언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한 결과, 결국 가나안을 쫒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추구합니까 아니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행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먼저는 내 안에 그분의 나라를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도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그리고 우리 가정안에 하나님의 영광만이 목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렇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사사기

목록
번호 제 목 이 름 성경구절 날짜
44 사사기 강해 44. 죄의 집단성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21:25 2018.12.23
43 사사기 강해 43.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의 집단성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20:7-10 2018.12.16
42 사사기 강해 42. 하나님의 법과 질서가 사라진 사회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9:30 2018.12.02
41 사사기 강해 41. 힘의 원리가 아닌 섬김의 원리로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8:1-10 2018.11.25
40 사사기 강해 40. 분배의 정의가 사라진 시대의 소망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7:6-13 2018.11.11
39 사사기 강해 39. 하나님의 백성의 우상숭배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7:1-6 2018.11.04
38 사사기 강해 38. 삼손이야기의 결말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6:21-31 2018.10.28
37 사사기 강해 37. 성도의 힘의 근원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6:15-20 2018.10.21
36 사사기 강해 36. 세상과 충돌하라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5:9-20 2018.10.07
게시물 검색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