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9. 진단과 치료
사사기 2:11-15
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진단이 잘못되면 치료 또한 잘못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질병에 걸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오진하게 되거나 또는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하게 되면 치료가 불가능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밝혀내지 않는다면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실패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병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지만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길로 나아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것을 추구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공을 추구했고 돈과 권력을 따라갔습니다.
세상이 이것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것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속화 되었고 더 이상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증거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통하여 얻게 되는 성공과 부와 건강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강단에 세우고 자랑했습니다. 그들 중에 현재 비리에 연루된 장로 대통령도 있고 성추행에 연루된 검사장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섰을 때 과연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에 학교에서 촌지는 관행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분당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동료목사 사모님께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교사 면담이 잡혔는데 촌지를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사모로서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혹시 아이가 불이익을 받지나 않을까 염려된 나머지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드렸습니다. 다음날 봉투가 돌아왔습니다.
당황한 사모님은 주변 학부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돈이 적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교사가 청렴해서 그런 건지, 대답은 50만원을 넣어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0만원을 넣어 다시 보냈습니다. 결과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학부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교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촌지를 넣어 보낼 때 그 마음의 중심이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그 사모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사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언약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사사기를 통해서 내 자신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비판하고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약백성들의 모습, 즉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목전에서 바알들을 섬겼습니다.
12절에,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신들에게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13절에,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어떤 신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날씨와 전쟁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바알은 기후를 조절한다는 점에서 풍요의 신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곡식을 위해 비를 내리는 신입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배우자 여신으로 동식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존재로서 사랑과 쾌락과 풍요와 다산을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가나안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이 부부신을 잘 섬겨야 그해 곡식의 풍요가 결정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만일 적절하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신전에 창기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성관계를 함으로 부부신을 자극하게 되면 비가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가나안의 문화는 풍요와 안정 그리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장받기 위해 그들이 만든 신이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이러한 가나안의 문화는 인류역사가 존속하는 한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풍요를 꿈꾸고 그것을 지키고자 안정을 추구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쾌락을 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이것이 왜 잘못된 것일까요?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좀 더 넓은 집에 살고 싶은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재력이 있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좋은 것 아닙니까?
여행도 많이 가고 경치 좋은 곳에서 맛난 음식도 먹으면서 삶을 즐기는 것이 뭐가 잘못 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존중받으면 삶이 더욱 행복해 지는 것 아닐까요?
풍요와 안정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 때,
첫째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그러나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 많은 풍요와 더 많은 쾌락을 추구합니다.
“이만하면 됐어” 하고 만족하지 않고 “조금 더” 추구합니다.
조금 더 넓은 집에 살고 싶고, 조금 더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조금 더 높은 연봉을 받고 싶고,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사십니까?
여러분의 배우자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조금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은 현재의 직장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좀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현재의 내 외모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성형을 해서라도 고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또는 내 자녀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우리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풍요와 안정과 쾌락을 조금씩 더 추구합니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이 수단화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사랑하는 가족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조차도 수단화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삶이 피폐해 집니다.
사람들을 순수하게 만나지 못합니다. 손익을 따져야 하니까....
일도 즐겁지가 않지요. 돈 벌기 위한 수단이니까....
공부도 억지로 합니다. 좋은 대학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결국 이러한 것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과정이 즐거운 것인데(일, 공부) 억지로 해야 되는 짐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습니다. 과정 가운데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방식이 동원됩니다.
이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잘못 설정되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임을 제가 거듭 강조합니다.
세상은 지금 다 이렇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가만있으면 저절로 이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 다 이것입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친구들을 만나도 주변 사람들을 만나도 다 이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도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이야기, 아이들 교육 이야기,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 보낼까?
청년들은 주로 무슨 이야기 합니까?
한때는 선교사로도 헌신하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했던 동창들이 잘 만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친구 자녀는 외고, 과학고 들어가고 또 어떤 친구 남편은 돈 잘 벌고 어떤 친구는 서울 강남의 좋은 아파트 살고...
비교되니까 안 나가는 겁니다.
그때 그 신앙은 어디갔을까? 왜 우리는 현실의 삶 속에서 이토록 무력한 것일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풍요와 안정과 쾌락을 계속해서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삶의 결핍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돈을 그렇게 벌고 싶어 합니까? 평생을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모아놓고도 왜 계속해서 돈을 추구할까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삶의 평안과 안정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아무리 채워도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쾌락을 추구합니까?
그 어떤 쾌락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결핍의 문제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버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또한 바알도 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장 친밀한 관계로 비유한 것이 남편과 아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의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신부입니다.
신부가 남편과 함께 살면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와 바람을 핍니다. 남편이 볼 때 아내는 남편을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바알도 섬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간음을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하고
17절에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볼 때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믿고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할 것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잘되고 형통한 것은 너희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그들은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노략을 당했고 대적에게 패했으며 그 결과 괴로움이 심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그의 백성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 것입니다.
14절에 “넘겨주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손길을 거두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그분께서는 굳이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놓아버리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망합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볼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것 같은데 사실은 그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시면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여호와의 손이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어긋난 자녀를 채찍질 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자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괴로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인지 아십니다.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고 때로는 세상의 풍요와 쾌락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을 압니다.
그때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가 무엇입니까? 그래 한번 그렇게 살아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요구하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재산의 반을 주고 그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래 한번 살아봐라. 막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쾌락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다 결국 돼지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눅15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호세아 6:1-2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가져도 하나님이 우리 삶의 계시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만족함이 없고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함께 하신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함이 찾아올 것입니다.
안식의 땅에서 안식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그분의 내 인생의 전부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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