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23. 세겜에서 왕이 세워지다
사사기 9:1-6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은 이미 8장 후반부에 기드온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대목에 등장합니다.
8장 30-31절을 보시면,
“30.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기드온의 아들이 70명이란 것은 그가 정략결혼을 통하여 이스라엘 각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 세겜지역에서 첩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 아비멜렉입니다.
그가 9장에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기드온의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타락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기드온의 타락은 당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왕같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질병에 의해 죽거나 대적의 공격을 받아 죽은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삿 8:3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
성경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기록하는 것은 왕들뿐입니다. 그 동안 살펴보았던 사사들 중에 죽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왕같은 삶을 살다가 평안히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과연 어디 갔는가?
타락한 기드온의 삶을 하나님은 왜 그냥 두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악인들의 형통함을 바라보면서, 왜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 두시는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면 왜 악한 자들의 삶이 형통하도록 두시는가?
오히려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괴로워하며 아파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이 9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악에 대하여 어떻게 보응하시는가 하는 것이 9장의 내용입니다.
기드온 당대에는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심판이 그의 아들 때에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적배경이 되고 있는 세겜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인류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시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임하는 그분의 나라를 가나안땅에서부터 시작하길 원하셨습니다.
그 일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시작하신 것입니다.
<창12:1-9>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갔더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한 장소를 지목하시는데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세겜입니다.
6절을 보시면,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시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구성하십니다. 이들을 어디에서 양육하시는가? 애굽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 그중에 야곱을 통해 열두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하게 하십니다. 그 중에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시고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이 있었지만 그를 총리로 세우시죠. 그리고 가나안의 7년 동안의 큰 기근이 있을 때에 이스라엘을 요셉의 보호아래 애굽에서 강성케 하십니다. 그 기간이 430년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50장에 요셉이 죽으면서 유언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뼈를 이곳에 묻지 말고 가나안땅으로 가지고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곳으로 내 뼈를 가지고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 하면서 요셉의 뼈를 가지고 나옵니다.
<출13:18-19>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이후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는 가나안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모읍니다. 그곳이 어디인가? 세겜입니다. 여호수아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 약속하셨던 것과 그것이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셨는가를 설교합니다.
여호수아 24장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 중요한 부분만 읽겠습니다.
“1.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2.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계속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기 위하여 너희의 연약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얼마만큼 신실하셨는가를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14절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기 온전함과 진실함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신실하셨던 그 하나님을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24-25절입니다.
“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25.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이렇게 세겜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길 것을 언약합니다.
그리고 나서 26-27절을 보시면,
“26.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이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 큰 돌을 성소 옆에 상수리 나무 아래에 세우게 됩니다.
세겜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거, 그리고 신실하신 그 하나님을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겠다고 언약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에서 지금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세우고자 했던 그 분의 나라는 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정제도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들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백성의 주권은 하나님이 가지시며 그 통치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지도자가 세워졌어도 그는 항상 율법책을 옆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대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왕이 되려고 하고 또 왕을 세우려고 하는가?
이스라엘이 왕을 본격적으로 요구하는 장면이 사무엘서에 기록됩니다.
그때의 장면을 보면,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그들이 왕을 원하는 것은 나를 버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거부하기 위해서 인간 왕을 세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왕정제도가 너희에게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그 내용이 11-17절까지입니다. 결국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가 세운 그 왕으로 인해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왕을 세우고 그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 보다, 세상 나라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조정할 수 없지만, 인간 왕은 우리가 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세우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여론을 통하여 세운 왕은 인간의 여론을 통하여 쉽게 조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들어가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국정 현안 관련, 국민들 다수의 목소리가 모여 30일 동안 2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추천한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각 부처 장관, 대통령 수석 비서관, 특별보좌관 등)가 답하겠습니다.”
물론 다수의 의견이 옳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장로교 정치제도도 이런 원리를 따릅니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모두 정의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 즉 하나님의 정의를 버리고 인간 스스로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인간 왕을 세우게 되면 삶이 편하고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고 그것을 합리화하기가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낙태법 폐지에 대한 논란입니다.
한편에서는 낙태죄는 여성의 임신, 출산의 자유를 제한하고 임신 초기 안전한 중절수술을 제한함으로써 임부의 건강권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임신 12주까지는 낙태가 임부에게 부담이 적은 시기이고 태아가 독자적인 생명력이 없어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는 전면 허용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대해 낙태죄 합헌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태아도 엄연한 생명체이고 생명보호는 사회적 공의이기 때문에 신중히 다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임부의 건강 등 낙태해야 할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낙태 허용 범위를 어떻게 정할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예외적으로 낙태 허용 범위를 결정하면 된다고 합니다. 또 임신 12주 이내 등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생명권 보호기준을 달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팽팽한 주장 속에서 과연 인간은 어떤 결정을 하겠습니까?
인간의 역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정의 보다는 인간의 유익과 편리에 편승하는 결정들을 해왔습니다. 이미 동성애에 대한 합법화는 세계적 흐름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갈등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문제의 답을 발견합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의 존엄성을 담은 십계명에서 결코 흔들릴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마음껏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이를 쉽게 낙태해 버릴 수 있다면 많은 젋은 이들이 쉽게 쾌락을 탐닉하고 아이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하고 태아의 인권은 짓밟혀도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왜 우리가 왕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 맘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너무나 불편한 것입니다. 맘대로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가서 자기 동족들에게 혈연을 강조하며 호소합니다.
70명의 기드온의 아들이 다스리는 것과 내가 너희를 다스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으냐?
당연히 그들은 아비멜렉의 다스림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조정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쉽게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겜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 우상 신전에서 나온 돈을 그에게 정치자금으로 대줍니다. 아비멜렉은 그것을 받아가지고 오늘날로 하면 정치깡패들을 삽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 칠십명을 한 바위 위에서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세겜의 상수리 나무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처음 정착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경배한 곳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세우고 큰 돌을 세운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겠다고 언약한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곳에서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묻어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무참히 버려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9장을 통해 앞으로 다스림의 문제를 계속해서 다룰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 신실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의 다스림 받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그 분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마귀의 종으로 살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을 주고 사시고 그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신실하신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 보다는 내 마음과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왕인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불편한 것입니다. 내 뜻과 의지대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그냥 내 삶에 문제가 있을 때 도와주시는 정도면 좋을 것 같은데 내 삶의 주권을 가지고 나를 다스리려고 하면 싫은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다스리십니까?
내 삶을 끌어가고 결정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지금껏 여러분의 모든 가치판단과 선택과 결정 가운데 진정 하나님이 다스리셨습니까?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부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세상의 더럽고 추한 것들로 인해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점점 피폐해져 갈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종으로 서시길 바랍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며 사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이 가치있는 삶이 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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