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27. 입다의 비극적 인생
사사기 11:29-40
29.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입다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몇 주간 살펴보게 될 텐데요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편의 비극적인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진행하는 설교도 성경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첫 장면을 오늘 본문으로 잡은 것입니다.
간혹 영화를 보면 첫 장면에 결론이 나오고, ‘10년 전’ 하면서 사연을 추적해 가는 것처럼,
저도 그런 식으로 설교를 구성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입다 이야기의 가장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서원을 합니다. 서원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조건부 약속입니다. “하나님! 만일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는 것처럼, 입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시면 내가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에서 가장 먼저 나와 나를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번제물로 드리겠습니다.” 라고 서원한 것입니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은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입다가 서원했다는 것이고 그 서원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가 관심입니다. 그래서 전쟁 상황은 32,33절에 두 절로 간단하게 요약해 버립니다.
이제 그의 서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34절입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이 장면을 여러분 어떻게 보십니까?
아버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이제 이스라엘의 지도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그의 딸이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집에서 일하는 하인 중 하나가, 또는 이웃에 사는 누군가가 그 소식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가 이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단다.’ 딸은 그 소식을 들으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나중에 나오게 되겠지만 이 딸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의 애절했던 삶의 스토리를 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쟁의 영웅이 된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그의 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오기만을, 그래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순간을 손꼽아 기다린 것입니다.
딸은 드디어 아버지가 마을에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딸은 그동안 노래와 춤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가 오시면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한편 집으로 향하는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토록 원했던 이스라엘의 지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 까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과연 누가 자신을 첫 번째로 반기러 나올까 하는 초조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제발 딸이 아니 기만을 바랬을 것입니다.
딸은 이제 소고를 두드리며 춤을 추며 그의 아버지께로 향합니다. 입다는 저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소고소리와 춤추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가 제발 딸이 아니기 만을 얼마나 바랬을까요? 그러나 그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를 첫 번째로 맞이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딸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서원을 알 리가 없는 딸은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다 이야기의 첫 번째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 장면을 주목해서 볼 것을 유도합니다.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34)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입다는 자기옷을 찢으며 절규하듯 외치기 시작합니다.
35절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딸은 처음에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이내 상황을 깨닫게 됩니다.
딸은 가슴을 치며 흐느끼는 아버지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36절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딸이 너무 착해서 더 슬픈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원을 하셨다면 그대로 내게 행하십시오.
또 이렇게 말합니다.
37절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내게 두 달만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산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딸은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없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했던 서원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입다가 말합니다.
“가라” 입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입다는 말에 상당히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이유중에 하나도 그의 논리정연한 말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에 유능한 입다가 할 수 있는 말은 “가라”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딸은 두 달의 기한을 보내고는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서원한대로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번제는 죽이고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 사랑하는 무남독녀 딸을 그렇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입다 이야기는 상당히 난해합니다. 그래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의문은 입다의 서원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고 그 서원을 지킨 것은 과연 믿음의 행동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 잘못된 서원을 한 것이죠. 그는 자신의 집에 사는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서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하나님의 백성다운 서원입니까?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비록 잘못된 서원을 하였지만 그 서원을 값은 것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다운 것입니까? 아니면 잘못된 것입니까?
복잡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의 서원이 비록 잘못되었지만 그가 서원을 값은 것은 믿음의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갚아야 하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의문은 입다가 자신의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로 서원을 했는데 그가 진짜 사람의 생명을 걸고 서원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의견이 나뉩니다. 한편에서는 입다의 서원은 집에서 키우는 개를 염두해 두고 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집에 가면 제일 먼저 개가 반기지 않습니까? 입다가 그것을 염두하고 서원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세 번째 입다는 과연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키우는 개를 염두하고 서원을 했지만 무남독려 딸이 첫 번째로 나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딸을 번제로 드렸는데 과연 진짜로 그랬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한편에서는 여기 등장한 번제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태워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으로 바친 것으로 해석합니다.
우리도 은혜 받으면 ‘하나님 내 생명을 드립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딸이 결혼도 못하고 평생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으로 바쳐졌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입다를 믿음의 사람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영웅들을 언급할 때 사사 4명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입다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또한 삿11:29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입합니다.
따라서 입다는 성령님이 임재한 사람이며 또한 믿음의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이 사건을 해석하니까 억지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먼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삼손은 아직 살펴보지 않았지만 기드온 바락 같은 경우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사사기는 그들을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이들을 믿음의 인물로 언급한 것은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하사 순종했던 행동들로 말미암아 이루신 구원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전체를 믿음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결코 사람을 영웅화 하여서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하니까 그의 삶 전체를 믿음의 행동으로 끼워 맞추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서원이나 딸을 번제로 드린 행위까지도 믿음과 연관하여 억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이해입니다.
입다는 실제로 사람을 걸고 서원을 했고, 또한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수종드는 여인이 아니라 죽이고 태워 드리는 제사로 바쳤습니다. 만일 딸이 번제로 드려지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입다가 그토록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였고, 그의 딸도 두 달 동안의 애곡의 기간을 달라고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애곡하기 위해 해마다 나흘씩 시간을 내었던 것입니다. 성전에 수종드는 여인으로 바쳐졌다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비참했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입다가 했던 그 서원, 그리고 사랑하는 딸의 마중, 그 딸을 번제로 드려야 했던 입다.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을까?
이제 그것을 추적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전체에 흐르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입다의 가문을 보려고 합니다.
입다는 11장에 등장하지만 그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 10장입니다. 10장은 앞으로 입다 뿐만 아니라 삼손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그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10장 6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그동안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동안 언급된 신들은 그랬습니다.
이들은 풍요와 안정을 보장해 주는 신들이었죠. 그런데 여기 언급된 우상들의 목록을 보니까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의 신들, 블레셋의 신들을 섬깁니다. 즉 가나안의 있는 모든 우상들을 다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버렸다. 이 표현은 하나님 편에서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나안의 우상들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입다의 시대에 우상숭배가 최고조에 달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신들을 가리지 않고 전부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상숭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이를 위해 그분의 말씀과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그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내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의 행복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내 행복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내 삶의 목적이 나의 행복으로 규정되면, 어떤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어떤 권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주는 자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만족시켜 주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서서히 내 삶에 중심부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하나님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하며 살아갑니다. 자연히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러한 신앙의 특징을 세가지로 정리해 보았는데
첫 번째가 자기 중심성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는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 나를 만족시키는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와 거짓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리이고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스스로가 판단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열정입니다. 이것이 무서운데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진리에 대한 분별력은 없으면서 열정이 있으면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가 바로 입다인 것입니다.
그의 자기 중심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자신의 성공을 위해 가족의 생명을 담보물로 삼습니다. 자신의 딸의 죽음 앞에 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35절)” 자신의 감정만을 생각합니다.
진리와 거짓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잘못된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혼합주의 신앙에 젖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서원을 한 것입니다. 인신제사는 가나안의 우상 특히 몰렉신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신을 위해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바치면 신께서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주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 방식이 몰렉신을 섬기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열정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의 방식에 열정까지 더해져 결국 그의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열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짓에 대한 열정은 참혹한 결과를 낳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정이 진리위에 세워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입다의 이러한 비극적 사건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진정으로 진리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진리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내 신앙이 하나님 말씀위에 세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정이 중요하죠.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열정과 열심히 진리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목적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모습들이 과연 진리의 말씀위에 세워졌습니까? 아니면 내가 편하고 좋은 방식으로 또는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은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살았으나, 마지막 순간에 속았다고 깨달을 때입니다. 그것처럼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 전체가 허무해 지는 순간인 것입니다.
인생의 경기장이 평편하든 또는 기울였든 아무튼 우리는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지금 바르게 가고 계십니까?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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