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08-14 12:09

사사기 강해 28. 입다이야기의 교훈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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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황이 녹음되지 않아 따로 녹음한 것입니다)

 

사사기 강해 28. 입다 이야기의 교훈

 

사사기 10:17-18  

17.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우리가 지난 시간 입다의 비극적 인생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열정과 헌신의 사람이 전쟁에 앞서 사람을 번제로 드린다는 서원을 하였고 또한 자신의 무남독녀 딸을 번제로 드렸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적 사건의 원인을 당시의 시대적인 영적 배경 속에서 추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입다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모든 신들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만족과 유익을 줄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섬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진리와 거짓에 대한 분별력이 흐려지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정을 다했지만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사기 10:17-18>
“17.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길르앗에 진을 친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여기서 ‘모였다’는 동사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둘다 ‘모였다’로 표현했지만, 암몬은 전쟁을 위해 모인 것이고 이스라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치해야 될지 의논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적들 앞에서 허둥지둥 대며 과연 누가 먼저 이 전쟁에 선봉에 서서 전쟁을 이끌 것인지를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이 전쟁을 이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원래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의 백성을 통해 가나안의 민족을 진멸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전쟁가운데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을 통해 전쟁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동안은 그랬습니다. 그들이 사사였습니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바락, 기드온. 이들은 비록 연약함과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사사기 3:9>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사사기 3: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자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구원자를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상황을 잘 보시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보게 됩니다.  비슷한 장면이 1장에 나오는데 완전히 상반된 모습입니다.
<삿1:1-2>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은 항시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소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0장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소통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하나님께 묻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경험과 지혜를 짜내며 이 전쟁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사라져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로 준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이 있겠지요. 예를 들어 취업을 위해 각종 스펙을 준비하고 자술서를 잘 쓰는 것, 면접을 위한 준비 등 모든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에 밀려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도를 통해 준비되어졌을 때 비록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순적하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준비로 분주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 인생의 쓰라린 경험들이 대부분 기도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고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의 나라를 이루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그의 백성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 후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임하기 때문입니다. 땅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영역을 말합니다.

 

우리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며 우리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안식이 우리 삶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내 뜻과 내 의지를 세우게 되면 비록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모습 속에서 그들이 얼마만큼 하나님과 멀어졌는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 어떠한 결정을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수준에서 최선이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이끌 리더를 찾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금을 내겁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자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장면이 바뀝니다.
영화로 치자면 처음에 전쟁을 앞두고 미스바에 모여있는 길르앗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장면1입니다. 장면2는 돕땅에 있는 입다입니다. 카메라가 줌렌즈로 그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면서 그가 그곳까지 오게 된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그것인 11장 1-3절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카메라가 미스바에 모여있는 길르앗 사람들 그 중에 장로들을 비추어줍니다.
그들이 입다를 전쟁의 리더로 세우기 위해 찾아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4절부터입니다. 
이러한 문학적 구성을 이해해야 본문이 좀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면 입다는 어떤 사람인가?
입다는 길르앗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도 출생지역의 이름과 같은 길르앗입니다. 입다는 길르앗과 기생사이에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여기서 기생은 몸을 팔아 살아가는 창기를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뭔가 애잔한 느낌이 듭니다.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어릴적 함께 살게 됩니다. 유소년시절에는 아이들아 잘 모르지요. 입다가 아버지가 밖에서 창기를 통해 낳은 아들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형제들은 입다의 출생의 배경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의 구박과 천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자라서 청년의 시기였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찾아와 입다를 집에서 쫒아냅니다. 기생의 아들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2절에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이 말이 그의 가슴에 못처럼 박혔을 것입니다.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기업을 잇는다는 것은 가문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조상때 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축복이 후손에 까지 이어짐을 의미했습니다. 자녀들을 통해 후손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성은 항상 아버지가 누구이냐를 통해 규정되어지곤 했습니다. 성경의 어떤 인물을 소개할 때 누구의 아들로 소개하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아버지의 기업을 잇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고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더 이상 길르앗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창기의 아들로 주류사회에서 내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원망스러웠을 까요?
자신이 원해서 창기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형제들에게서 내쫒기는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서러움이 그의 청년기를 주도했을 것입니다.

그가 집에서 내쫓겨 갈 수 있는 곳은 돕 땅이었습니다. ‘돕’이란 작은 도시를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회적 약자로 주류사회에 흡수되지 못한 이들이 이 도시에 몰려 살았습니다.

입다는 비록 창기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상당한 식견과 언변술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절에 그를 큰 용사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체구가 장대하고 싸움에도 능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다의 탁월함은 돕 땅에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도둑질이나 약탈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 성경에는 잡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날로 하면 조직폭력배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입다를 자신들의 보스로 추대한 것입니다.
이들이 조직을 갖추고 하나의 용병그룹을 형성한 것입니다.


이들의 전투력과 조직력이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입다의 리더쉽이 탁월했던 것입니다.

장로들이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입다와 장로들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장로들이 말합니다. 6절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입다가 대답합니다. 7절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그러자 장로들이 말합니다. 8절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입다에게 있어서 그토록 바라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동안 길르앗 공동체의 주류에서 벗어서 비주류로 살다가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진출할 그것도 지도자로 신분상승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도자가 되면 그것은 뿌리와 근본이 상실한 그의 삶에 입다 가문이라는 영광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협상을 시작합니다.

 9절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절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이제 입다는 여호와를 증인으로 세워 약속하는 장로들의 확답까지도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스바에서 길르앗의 지도자로 추대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모여있는 사람들 앞에서 장로들과 맺은 협약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11절입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이것은 장로들과 맺은 협약을 하나님께 아룀으로 번복할 없게끔 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제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입다가 장관이 되고 첫 번째 했던 행동은 암몬 왕과의 외교적 협상이었습니다.
최근 미국의 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의 협상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탁월한 지도자일수록 협상에 능합니다. 지금 입다의 협상의 장면을 통해 성경은 그가 얼마만큼 탁월한 지도자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암몬왕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내 땅을 침범하여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입다는 세 가지 내용으로 이스라엘이 모압 땅을 점령하지 않았음을 논증합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 논증입니다. 16-22절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요단강 동쪽 지역 정복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하면서 당시 이스라엘이 취한 땅은 암몬과 모압의 땅이 아니라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입다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정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입다는 입을 열기만 하면 능수능란하게 사람을 설득시키는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장로들과의 협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그가 압몬 과의 외교적 대화 가운데서도 손쉽게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신학적 논증입니다. 23-24절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법적인 선례입니다. 25-27절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시혼 왕에게 이 땅을 빼앗았을 때, 당시 모압 왕이 그 땅이 자기 것이라고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이 길르앗 땅을 시혼 왕에게서 빼앗을 때 당시 모압 왕이었던 발락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당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을 차지한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즉 모압의 땅이나 압몬의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300년 동안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암몬 왕이 그 땅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교적 협상을 암몬 왕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해졌습니다.

성경은 왜 이리 길게 이러한 협상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협상을 통해 입다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여호와의 전쟁에 있어서 협상이란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듯이 진리는 거짓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전쟁에 있어서 단 한번도 협상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가나안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것과 협상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입다가 협상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을 도모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가는 좁은 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넒은 길을 추구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입다에게 있어 진리와 거짓에 대한 경계가 모호합니다. 이 부분은 지나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입다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습니다.
두 번째 신학적 논증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이 섬기는 그모스 신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봅니다. 입다 시대에 하나님은 가나안의 여러 신들의 하나처럼 취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 즉 세상과 타협하고 하나님을 이방신들 중에 하나로 취급하는 모습은 결국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과 협상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면 내 집의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습니다.”

 

입다가 지도자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자신의 무남독녀 딸을 번제로 바치고 그 가문이 멸절한 것은 그 자신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방 신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자신의 신앙이 혼탁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습들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저는 가끔 성도님들과 대화하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데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또는 무속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얼마나 많은 무속신앙들이 들어와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세운 신앙이 진리의 말씀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반석위에 세운 집과 모레위에 세운 집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똑 같은 집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폭우가 내리면 모레위에 세운 집은 쓸려 무너집니다. 반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신비한 체험이나 믿음의 좋다고 하는 어떤 분의 말이나 내 주관적 생각위에 신앙을 세우면 위험합니다. 때로 우리 삶에 어려움과 고난의 순간 그 신앙은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섬겼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들의 신앙이 언제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진리의 말씀위에 신앙을 세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의 말씀위에 우리의 신앙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바른 신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바른 신앙은 올바른 지식과 굳건한 신뢰입니다.
이 땅에 올바른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입니다.
성도들은 그것만을 굳건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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