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34. 꿀처럼 달콤한 죄의 유혹
사사기 14:1-9
1.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2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3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4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5 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9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사사기 강해 34번째 시간으로 ‘꿀처럼 달콤한 죄의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삼손이야기로서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나실인이 지켜야할 규례 또는 금기사항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실인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성막제사를 의미합니다. 당시에 레위인들이 이 일을 도맡아 진행했습니다.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이 일에 헌신하기 원할 경우 나실인 서원을 통해 서원한 기간 동안만 성막제사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의 부모가 서원한 것도 아닙니다. 나실인으로 태어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며 선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을 때 까지 나실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선택에 의해 되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하거나 서원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엡1:4-5>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나실인으로 태어났을 때에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나실인으로서의 사명입니다. 세상과는 구별되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쓰임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평생을 나실인으로서 세상과는 구별되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예배입니다. 그것은 현재 주어진 나의 일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우리가 함께 살펴볼 내용은 나실인의 세 번째 금기사항인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것과 연관됩니다.
사사기 13장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실인의 금기사항에 대하여 전달하면서 이 부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14장의 내용이 이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삼손이 사자를 죽이게 되고 그의 시체를 만지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나실인의 규례를 깬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민수기 6장에서 시체를 만지 말라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6:6-7>
6.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 그의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었을 때도 그 시신을 가까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갑자기 죽어서 어떨 수 없이 시신을 가까이 하거나 만지게 되면 나실인의 서원이 깨지게 되어 머리를 밀고 각종 제사(속죄제, 속건제, 소제, 요제)를 통해 정결케 한 후에 다시 처음부터 나실인의 서원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시체는 죽음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죄의 결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죽음이 들어왔고 그 결과물이 시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시체는 죄로 말미암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멀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실인의 머리카락이 생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시체는 죄와 사망을 상징합니다. 나실인이 이것에 접촉하게 되면 그 또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죄에 접촉된 상태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지시한 모든 제사, 속죄제, 속건제, 소제, 요제 까지 다 해야만 다시 깨끗하게 되어 나실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어떻게 해서 시체에 접촉하게 되었습니까?
14장 1절을 보면,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당시 삼손이 속했던 단지파는 블레셋지역과 접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팔라스타인지역의 서쪽 해변지역이었고 단지파는 그곳과 접하여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단지파는 평창 정도에 있고 블레셋은 강릉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단지파는 이때까지는 팔레스타인지역의 중앙부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쫓겨나서 북쪽 맨 위쪽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온 지역을 지칭할 때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하게 되죠. 우리가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삼손이 딤나 지역으로 내려갑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지역이었지만 그곳에서 블레셋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마음에 담게 됩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가 블레셋 사람들이 갈등없이 공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땅의 모든 민족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부모에게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그의 부모가 반대하지만 삼손의 고집을 꺽지 못합니다. 결국 삼손과 그의 부모가 함께 그 여인을 만나러 딤나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딤나 지역으로 내려가니까 포도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삼손은 당연이 포도원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이르렀다”고 되어있는데 원문은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포도주를 마셨다든가 그 어떤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나실인으로서의 신중함이나 조심성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젊은 사자를 맞닥뜨립니다. 그냥 사자도 아니고 젊은 사자라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말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임합니다.
6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그에게 놀라운 담력과 힘이 생기게 되었고 사자를 찢어 죽이게 됩니다.
이후 딤나에 도착하여 그 마음에 두었던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여인과 대화를 하게 된 것입니다. 대화를 해보니까 더 맘에 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외모에 끌렸는데 막상 만나 대화해보니까 더 매력적인 것입니다. 블레셋 여인도 마찬가지로 삼손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인에 대한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삼손이 다시 블레셋 여인을 맞이하려고 딤나로 내려갈 때였습니다. 지난 번 죽였던 사자의 시체를 다시 보게 됩니다. 이 부분을 함께 보겠습니다.
<삿14: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여기 “돌이켜”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여자를 만나려고 가다가 돌이켜 그가 죽였던 사자의 시체를 확인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 “돌이켜”라는 단어는 원어로 “수르”라는 동사인데 그 어근이 “옆으로 빗나가다” “고개를 돌리다” “벗어나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삼손이 마땅히 가야될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은 시체를 보러 돌이켰다는 것은 나실인으로서 살아가야 될 삶의 길에서 이탈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주의깊게 보셔야 합니다.
지금 삼손이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있습니다. 거기에 사자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사자가 나타난 것은 우발적이고 그래서 그것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블레셋 여인을 만납니다.
이번에는 사자의 시체를 보러가는 것은 의도적입니다. 이후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 성경은 삼손이 사자를 만난 것과 여인을 만난 것을 연관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인 사자의 시체를 보러 의도적으로 다가갑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돌이켜” “수르”가 사용된 곳을 찾아오면,
<출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신9: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한 길에서 떠났을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지금 사자에게 돌여켜 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난 것이라는 말합니다.
<신11: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게 될 때 그들이 미혹당하여 돌이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삼손이 사자의 시체로 돌이켜 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께서 뜻하신 길에서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블레셋 여인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만나러 가는 것은, 마치 죽은 시체를 만지러 가는 것과 같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다른 사건이지만 의미하는 것은 같습니다.
즉, 성경은 삼손이 이방여인을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은 곧 죽은 시체를 만지는 부정한 것과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자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죽였습니다. 즉 사자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도무지 이길 수 없는 가나안의 우상숭배의 문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였는데, 그것을 다시 찾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꿀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가나안의 우상숭배의 문화가 얼마나 달콤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통하여 진멸시켰지만 마음속에는 가나안의 문화를 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죄의 문화가 주는 유혹이 달콤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나실인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사랑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삼손이 사자의 시체에 있는 꿀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모에게도 가져다주어 함께 먹습니다. 삼손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세대가 함께 달콤한 죄의 유혹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방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의 부모도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이방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반역하여 우상숭배의 길로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더 이상 나실인으로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원래 그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삿 13:24절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삼손은 여호와의 복을 받고 자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가 타락하기 시작한 것입니까? 딤나의 블레셋 여인을 보고부터입니다. 그 여인을 보고 그 마음 가운데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가 어떤 여인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단지 매력적인 외모에 반한 것입니다. 이후 그 여인을 만났을 때 더욱 좋아하게 됩니다. 마침내는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봅니다. 항상 죄는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죄다”라고 말씀하시죠. 음욕이 생기는 것은 항상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함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요한1서 2:16절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가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고 죄에 물들게 하는 것이 시각적인 것으로부터 먼저 옵니다.
가나안의 문화는 블레셋 여인처럼 화려하고 매혹적입니다. 그것이 유혹당하기 시작하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세가지 시험을 당하실 때 그 중 한 가지가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절하면 그 영광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귀는 시각적인 유혹을 통해 접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포장하여 뭔가 대단한 것 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사실 별것이 아닙니다. 선악과가 그저 열매인데 그것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게 한 것입니다.
많은 미혼의 청년들이 순간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해 평생 후회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내 앞에 있는 그 여인이 모든 것을 다 채워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돈이 많으면 내 삶에 행복이 극대화 될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집, 자동차, 각종 명품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나의 삶에 만족함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보여지는 것들에 의해 우리는 쉽게 죄를 범하게 됩니다.
다윗은 한가하게 왕궁을 거닐 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게 되고 결국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립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본다는 것이 한자로 세가지입니다.
볼시(視) 이것은 보려는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보여지기 때문에 보는 것입니다.
볼견(見) 주의깊게 보거나 분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볼관(觀)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입니다.
이 관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입니다.
내가 가진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성경을 토대로 잡혀있으면, 우리가 보는 것에 의해서 그렇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관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며 보여지는 것에 늘 흔들리고 따라서 불안정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이 관이 바뀌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삶은 결국 크고 작은 선택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현재의 나의 모습입니다. 그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이전과 동일한 것을 추구하며 선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삶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에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충만하고 풍성해 질 것입니다.
그것은 소유나 그 밖의 세상적 가치인 권력이나 외모 학벌 직업 등을 초월하게 됩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에 의해 우리 삶을 남들과 비교하여 나모다 잘난 사람 앞에서 위축되고 못난 사람 앞에서는 과시했는데 이러한 것을 초월하게 되니까 보다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대화하게 되고 거기서 얻어지는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가나안의 문화가 만든 세상적 시선과 평가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 삶은 훨씬 풍성해 질 것입니다.
누군가 백화점에 단 한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다.
다이아몬드입니다. 그것이 가장 가치있죠.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선하심은 영원합니다.
그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에 여러분이 힘을 다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중심 가운데 가치있게 여겼던 모든 것은 주변으로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주인으로 서실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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