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10-23 15:12

사사기 강해 36. 세상과 충돌하라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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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 36. 세상과 충돌하라

 

사사기 15:9-20
9.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3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사사기 강해 36번째 시간입니다. 삼손 이야기로서는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그분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들의 불충성과 불순종을 오히려 그분의 선하심을 이루는 방편으로 만들어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첫 번째로 보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얼마만큼 무기력한 상황으로 추락하였는가 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 분노를 블레셋에게 갚은 후 에담 바위틈에 머무르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친 것입니다. 여기서 진을 쳤다는 것은 유다를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삼손에게 당한 피해를 보복하기 위하여 유다진영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동안 사사기의 내용을 보면, 가나안의 이방인들이 전쟁을 하려고 진을 치게 되면 이스라엘과 전쟁에 돌입하였습니다. 특히 유다지파는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지파이며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과 전쟁을 해볼 만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어찌하여 너희가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이 말은 우리가 너희의 통치아래서 순응하고 협력하면서 잘 살아왔는데 왜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블레셋은 삼손이 우리민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너희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지만 삼손에게 입은 피해를 묵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지파가 삼손을 내어주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손을 잡아서 너희에게 내어줄테니 제발 우리를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을 찾아갑니다. 무려 유다 사람 삼천 명이 동원되어 삼손을 잡으러 갑니다.

 

11절을 보시면,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여러분 이 장면을 잘 보십시오. 유다 사람 삼천 명입니다. 그들이 삼손 한 사람을 잡기 위해 갑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서 하는 말이,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는 삼손의 행위를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유다지파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사사기가 시작될 때 그들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1:1-5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그들은 가나안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웠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다사람 삼천명이라면, 삼손과 힘을 합쳐 블레셋에 대항하여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삼손을 잡아 내어주고 대립의 상황을 종식시켜 보려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유다지파가 이렇게 추락하게 되었는가?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며 가장 강력했던 유다지파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우리가 읽은 1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첫 번째로 여호와께 누가먼저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여호와의 대답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유다가 시므온과 함께 올라갑니다. 물론 그들은 가나안을 치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상실된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올라가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지파는 스스로 판단하여 시므온지파를 동원시킨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했을 때 이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미 이때부터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싸움에 방식에 있어서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인들의 전쟁의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싸움은 진멸하는 것입니다. 잔혹한 고문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싸움의 상대가 비록 잔인하고 잔혹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의 그 존엄성을 헤치는 방식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6-7절을 보시면,
“6.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당시 베섹을 통치했던 아도니베섹을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 발가락을 자릅니다. 이렇게 해서 더 이상 무기를 잡지 못하고 거동을 불편하게 하여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인들이 전쟁 포로를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아도니베섹을 바로 죽이지 않고 그를 끌고 예루살렘까지 갑니다. 주변의 가나안인들을 위협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결국 그는 파상풍으로 죽게 됩니다.

더 나아가 유다지파는 철병거 앞에서 싸움을 포기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삿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보면 철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철병거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쫒아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사기 4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은 철병거 구백대로 무장한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시킵니다. 그러니까 철병거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철병거 앞에서 싸움을 포기합니다.

이와 같이 사사기 1장에서 보이는 유다

지파의 모습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도 신뢰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지파가 가나안에서 선택한 것은 전쟁이 아닌 타협과 공존이었고 삼손의 때에 이르러서는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했던 지파 유다,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사사 삼손.
오늘 본문은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가장 많이 받은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큰 능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결국 이렇게 타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지파나 삼손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은 블레셋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제물을 드리며 예배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때로는 놀랍고 신비스런 능력을 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21-23>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주여주여 하는 자들이 어떠한 자들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많이 받은 자라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나타내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이 행하는 모든 능력은 결국 불법입니다.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은사와 능력을 아무리 많이 받고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많은 은사와 능력을 받았는가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항상 온전한 순종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과 위치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누구와 비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유가 많건 적건, 내가 건강하던 그렇지 않던, 나이가 많던 젋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면, 만일 순종했다면 얼마만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항상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순종으로 더 강화되고 깊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한두 번의 순종으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반복적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거의 대부분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과의 타협은 성도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소금의 형체는 가지고 있으나 소금의 본질을 담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성도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습니다.

 

AW 토저는 세상과 충돌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가진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했다(행 3:6).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즉 ‘혼혈(混血)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마이클 윌톡은 사사기강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이란 있을 수 없다. 갈등이 없다면 세상이 정복한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목적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식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과 일시적이라고 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의 대립과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우리에게 만사형통을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감에 있어 환난은 불가피합니다. 이것을 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피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이고 타협하는 것입니다. 갈등이 없기에 상처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썩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갈등과 대립을 피하고 침묵하며 살아가는 것이 쉬운 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맛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디에도 쓸데없어 세상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옳은 길에 서야 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뢰가 없이는 옳은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옳은 길을 따라 가시는 믿음의 성도 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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