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11-06 11:50

사사기 강해 39. 하나님의 백성의 우상숭배

joywoori
댓글 0

사사기 강해 39. 성도의 우상숭배

 

사사기 17:1-6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미가의 가족은 전형적인 우상숭배의 가정이었습니다.
미가라는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훔치게 됩니다. 은 천백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연봉이 은 십정 도였으니까 약110명의 연봉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미가의 가족이 상당히 재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돈이 사라진 것을 알고 저주를 합니다. 아마도 ‘내 돈을 훔쳐간 자는 죽거나 망할지어다’ 하는 저주일 것입니다, 그것을 아들 미가가 듣습니다. 그리고 훔쳐간 돈을 어머니에게 가져옵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저주가 임할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 돈을 받자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어머니는 자신이 말한 저주가 행여 아들에게 임하지 않게 해달라고 저주를 취소하고 축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돈을 가지고 어떻게 했는가?
3절에 보면,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듭니다. 신상을 부어 만든다는 것은 당시 신상을 만드는 주조 틀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방인의 땅이 아닙니다. 에브라임 산지입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입니다. 그들 가운데 우상 제조 틀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러한 일이 빈번했음을 의미합니다.

어머니가 신상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신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미가의 어머니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장색을 찾아가 은 이백을 주고 신상을 만듭니다. 은장색은 우상을 제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중에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상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가 하면, 5절에 보니까 미가에게 신당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신당은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우상을 두는 신당을 생각하기 쉬운데 원어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그 집에 자신들이 만든 신을 가져다 놓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보면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드리빔은 제사장이 신의 뜻을 묻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습니다. 그것을 함께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까 제사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게 됩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인중에 그것도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 삼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형적인 우상숭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방인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인 에브라임산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도 중에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우상을 숭배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미가의 어머니가 홈쳐간 돈을 돌려받으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네가 여호와께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절)
또 그 돈으로 신상을 부어 만들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3절)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우상숭배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우상을 숭배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상을 숭배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님께서,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좇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도 전도하고 귀신도 내어 좇고 여러 가지 권능을 행하면서 자신들이 불법을 행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어느 누구도 그러한 자들이 주님과는 상관없는 자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고 추종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성도들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자신이 우상을 섬기는 줄도 모르고 섬깁니다.
오히려 열심을 다해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 열심의 대상은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우상을 숭배하는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내 자신도 우상숭배를 하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내 삶의 목적이 행복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위한 수단이 되어질 때 우상숭배입니다.
미가의 가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이 삶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절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13절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이 말씀은 미가가 떠도는 레위인을 자신의 집에 데려다가 제사장을 삼고 하는 말입니다.
그의 어머니나 그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것은 행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추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판단과 선택 그리고 결정의 순간에 행복이라는 가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행복하기 위해 공부하고 청년들은 행복하기 위해 직장을 선택합니다. 결혼도 행복하기 위해 하며 아이도 행복하기 위해 낳고 기릅니다. 우리나라 헌법 10조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합니다.

인간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토록 행복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행복을 저해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각종 사고와 자연재앙,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너지고 있는 나의 건강, 삶의 기반을 흔드는 재정적 손해,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의 어려움들, 한치 앞의 일도 알 수 없는 현실속에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언제 불행으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막연한 불안감이 늘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학여행을 간 내 아이가 배를 타고 간다는데 혹시 사고가 생기면 어떡하나?
군에 간 우리 아들 혹시 무슨 일 생기지는 않을까?
최근에 남편이 몸이 안 좋다고 하는데 무슨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 조금 진지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고 삶의 큰 위기 앞에서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선택한 길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 상황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를 신에게 의탁하고 현실의 삶에 만족하며 충실한 삶을 살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는 인간의 행복에 기여합니다.
현실적 삶에 대한 안정, 그를 통한 부의 축적, 미와 자연 그리고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는 건강의 보장 등.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결국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추구성이 기독교로 넘어오게 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기독교는 인간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추구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한정된 자원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결국 이웃을 착취하여 내 삶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착취하여 얻는 행복이란 결코 만족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의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이, 만일 이전의 삶의 방식, 즉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 우리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당연히 창조주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지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고백은 하면서 뒤로는 나의 행복을 챙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의 행복을 얻기 위해 간절히 원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밀어내고 섬김의 대상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 삶의 중심부를 그것이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러한 삶의 지원하고 지지하며, 때로는 실패와 연약함 속에 있을 때 위로하고 치유하는 분 정도로 인식합니다.
우리의 창조주로서 경배 받아야 할 분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자매가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아름답지 못한 외모라고 판단하여,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투자한다고 해봅시다. 그가 성형수술과 다이어트를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외모와 몸매를 소유한다고 해도 그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변한 자신에 모습에 만족할지는 모르나 시간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부의 노화와 신체의 변화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는 또다시 불행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의 외모에 그토록 집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우상은 바로 자기자신인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돈을 벌되 많은 돈을 단기간에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다고 해봅시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것이고, 더 나아가 돈이 많아 떵떵 거리고 살게 될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내 삶에 행복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섬기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기도는 자연히 나와 가족의 건강과 풍요와 안정에 귀착될 것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추구는 형식적인 기도로 추가될 뿐입니다.

내가 드리는 헌금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이 아닌, 나와 가족들의 삶에 무사안위와 만사형통을 보장받으려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행복은 그 목적대로 살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선배들 특히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자신감이 있었고 행복했으며 만족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고 때로는 병중에 있었고 온갖 죽음의 위협과 때로는 모진 고문을 견디면서도 감사가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는 또한 심각한 고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기에 그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길 원합니다.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많은 돈이었다면 그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가장 최선이며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계신데 무엇을 더 원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버린다고 잘지라도 아니 내 생명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더 존귀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세세 무궁토록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의 삶의 목적을 바르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삶의 모든 가치판단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판단과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속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담아내시기 바랍니다.

비록 부족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실수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이 길을 묵묵하게 걸어 나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 

사사기

목록
번호 제 목 이 름 성경구절 날짜
44 사사기 강해 44. 죄의 집단성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21:25 2018.12.23
43 사사기 강해 43.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의 집단성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20:7-10 2018.12.16
42 사사기 강해 42. 하나님의 법과 질서가 사라진 사회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9:30 2018.12.02
41 사사기 강해 41. 힘의 원리가 아닌 섬김의 원리로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8:1-10 2018.11.25
40 사사기 강해 40. 분배의 정의가 사라진 시대의 소망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7:6-13 2018.11.11
» 사사기 강해 39. 하나님의 백성의 우상숭배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7:1-6 2018.11.04
38 사사기 강해 38. 삼손이야기의 결말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6:21-31 2018.10.28
37 사사기 강해 37. 성도의 힘의 근원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6:15-20 2018.10.21
36 사사기 강해 36. 세상과 충돌하라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사사기 15:9-20 2018.10.07
게시물 검색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