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11-29 10:42

사사기 강해 41. 힘의 원리가 아닌 섬김의 원리로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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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시 설교가 녹음되지 않아 따로 녹음한 것입니다.

 

사사기 강해 41. 힘의 원리가 아닌 섬김의 원리로

 

사사기 18:1-10
1.그럴 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낮아지신 예수를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 영광의 날을 위하여 오늘도 섬김의 자리에 기쁨으로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2.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4.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5.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7.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8.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하니
9.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10.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1절은 18장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이죠.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먼저 이 말은 사사시대는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직접 그의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시는 시대라는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신적 대리자가 없었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권위가 없었다는 의미가 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무엇의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눈에 좋은 데로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직접 통치하시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배경은 단 지파는 거할 기업을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기업을 찾고 있을까요?
여호수아 18-19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실로에 모여 땅을 분배합니다. 그때 단 지파는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거할 기업을 찾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분배받은 기업을 땅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분배받은 기업은 블레셋 지역입니다.
블레셋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철을 녹일 줄 아는 기술을 보유한 민족입니다. 게다가 용맹한 전사들입니다. 
사사기 1:19절에 보면 “유다가 골짜기 거민을 쫒아내지 못하는데 그들이 철병거가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블레셋을 위시한 남부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므로 취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강하고 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 지파는 이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사사기 1: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 자신들의 거할 기업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땅을 정탐하기 위해 조상들이 해왔던 방식을 사용합니다. 먼저 땅을 정탐하기 위해 용맹한 다섯 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이 북쪽으로 올라가던 길에 에브라임 산지에 이르러 미가의 집에 유숙하게 됩니다. 아마도 미가의 집이 유력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레위청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아마도 레위인 특유의 어투가 있었거나 제사절차와 관계된 음성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들은 궁금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레위인 청년이 이 집에 있는가? 레위인이라면 도피성을 비롯한 40개의 성에 흩어져서 예배의 직무을 감당해야 하는데 왜 이곳에 있을까? 그래서 그에게 세 가지를 물어봅니다.

첫째,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는가? 둘째,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셋째,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이에 대해 첫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제사장 직분의 레위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쫒기 보다는 미가 가정의 풍요로운 삶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와 세 번째 질문, 여기서 무엇을 얻었는가? 에 대한 대답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미가가 여차여차히 나를 대접하여 나를 고용하여 자기 제사장을 삼았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쏙 빼놓고 미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 개인의 제사장 노릇하는 것이 양심에 꺼렸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고용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히브리 원어로는 ‘사카르’입니다. 남의 일을 위해 삯을 받는 다고 일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 공동체가 붕괴되었고, 제사장직분이 먹고 살기위한 방편으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수동적인 모습임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미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에 노예가 된 것입니다.

정탐꾼들도 그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조금 후에 보게 될 것이지만, 그는 좀 더 좋은 조건에 의해 자신의 삶을 움직일 것입니다.

이제 다섯명의 정탐꾼들은 제자장인 레위청년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올바른 절차들을 진행시켜 갑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 때마다 여호와의 뜻을 묻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수행하는 모든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이 전쟁에 참여하시는지 그 뜻을 물어야 했습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참전하시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은 패하고 맙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쟁을 이길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오직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의 참전에 달린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파의 정탐꾼들은 이 레위청년에게 자신들의 행할 길이 과연 형통한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청년는 과연 이 전쟁을 하나님께서 수행하실지 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6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평안히 가라”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길이 형통한 길이니까 평안히 가라고 말한다.  
“너희 행하는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며 확신있게 대답을 해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모습을 통해 이들이 바른 신앙에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미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기업을 취하려 하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묻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레위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한 것은 미가의 집에 있는 우상 신전과 제사 도구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에게 뜻을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 레위 청년이 여호와 하나님께 그 뜻을 물었다면, “너희는 이미 주신 기업을 취하라, 돌이켜 블레셋으로 향하라”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상신전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평안하라”였던 것입니다.

이 말에 용기를 얻고 5명의 정탐꾼들은 실로를 떠나 라이스 지역에 이릅니다.
7절을 보면 라이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설명합니다.
그곳은 평화롭고 한적한 어느 시골 마을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무사람과도 상종하지 않기에 전쟁에 대한 소문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누구의 간섭도 없이 한가롭고 평화롭게 살고 있는 어느 마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돌아와 그들이 정탐한 것들을 보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단 지파를 향하여 그 땅을 취하자고 도전하게 됩니다.
9-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10.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는지라“

여러분! 여기까지 살펴보면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보이십니까?
잘 보시면, 지금 이들은 모든 절차를 바르게 진행시켜 가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조상들이 해 왔던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형식과 절차는 바르게 진행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땅을 정탐하고, 이제는 그 땅을 취하자며 자신의 지파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보고에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였다” 담대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했을 때는 모든 것이 신앙적 행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 나갑니다.

무엇인 잘못되었는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가나안의 힘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단지파를 통해 블레셋을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병거 앞에서 포기하고 맙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에 좌우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땅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 결과 전쟁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한적하고 평온하게 살고 있는 라이스 땅으로 간 것입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가장 위쪽에 위치합니다.

27절을 보시면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한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폭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의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가나안땅에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곳을 진멸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심어 마침내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감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됩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상숭배가 극심한 나라일수록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인권이란 것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인권이란 이름으로 대두되는 수많은 이슈들이 사실은 기독교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위대한 가치로 말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귀한 것입니다.

만일 진화된 존재라면 강아지나 원숭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그들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우상은 자기 자신이죠.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조각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킵니다. 사회학자인 토마스 홉스는 이것을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이 만인을 대항하여 싸우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이웃의 존엄성을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대체적으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 지역에서 발굴된 신전들을 보면 수많은 아기들의 유골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아기를 제물로 드렸다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몰렉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매우 거대한 청동으로 지어진 몰렉신상은 거대한 손바닥을 펴고 있고 그 몸의 한 가운데엔 거대한 아궁이가 있는데, 이 아궁이를 때워 몰렉신상을 빨갛게 달구어 놓고 페니키아 시민들의 맏아들들을 갓난아기일 때 산 채로 빨갛게 달궈진 몰렉신상의 손 위에 올려놓는다. 이때 아기는 타 죽으면서 굴러 떨어져 아궁이로 들어가고 아기의 비명과 부모의 울부짖는 소리를 지우기 위해 엄청나게 큰 북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페니키아인들의 풍습은 그들이 세운 지중해 전역의 도시들에도 존속되어 카르타고 시민들은 전투에서 대패하자 300명의 귀족 아기들을 몰렉신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가나안의 문화를 지배하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힘의 원리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토마스 홉스가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이 만인에 대항하여 싸우는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키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단지파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어떠합니까?
가나안의 힘의 원리가 그들에게 보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적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도입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삶의 방식인 힘의 원리는 결국 19장에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가 도덕적 윤리적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온갖 음란하고 추악한 행위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19장부터가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죠. 동성애와 집단 성폭행, 살인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그 존엄성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가나안땅에서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것은 힘의 원리가 아닙니다. 
신명기 10:17-19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가지고 있는 조건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한지 가난한지 비싼 옷을 입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 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뇌물은 받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뇌물로 인간이 사용하는 힘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울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왜 하실까요? 19절에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힘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고 그것이 무시되고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이 섬김을 받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5:7-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이것인 가나안땅에서 이루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정의입니다. 강한 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부나 권면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겼을 때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9절에 죄가 된다고 하지요. 반면 순종하게 되면 축복이 따릅니다. 14장 29절이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강해져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약자들을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야 합니까? 공부해서 남주냐가 아니라 공부해서 남주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물질적으로도 축복을 받아야 합니까? 가난한 자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건강해야 합니까? 가족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가난함이나 약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실함과 열정으로 부함을 추구하고 강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강함과 부요함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위한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헌금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러한 말씀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부요하신 분으로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은 누리를 부여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한명의 주의 우편에 그리고 한명은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지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법은 그렇게 권세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부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하 하시면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시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스스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삶의 자세는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삶의 방식이 이제 우리 각 개인의 삶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발휘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강하게 하셨다면 그 강함으로 약한 자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실 때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의 원리가 작동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높고 낮음, 강함과 약함, 부함과 가난, 건강함과 질병 이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던지 간에 우리가 받은 은혜는 낮은 곳으로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은혜가 멈추어 있으면 고이고 썩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받은 은혜를 계속해서 흘러가게 하십시오.

그럴 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낮아지신 예수를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 영광의 날을 위하여 오늘도 섬김의 자리에 기쁨으로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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