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12-18 17:12

사사기 강해 43.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의 집단성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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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 43.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의 집단성

 

사사기 20:7-10 

7.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8.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9.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10.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이스라엘 사회 가운에 일어난 엽기적이고 끔찍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무시하고 살아가게 될 때 결국 어떠한 사회가 될 것인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은 파괴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분의 법과 질서를 삶의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면 삶이 아름답고 조화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면 당장에는 편하고 유익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레위인은 집단 윤간당한 자신의 아내를 12토막을 내어 각 지파에게 보냅니다.
소포를 열어본 지파의 장로들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 소식은 순식간에 이스라엘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하여 미스바에 모입니다.

레위사람은 자신이 격은 일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4절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6.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그의 진술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우리는 이미 19장의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이 위협 당하자 아내를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밤에 잠을 잤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모든 잘못을 기브아 사람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중심내용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자고 다짐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자고 결의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각 지파에서 제비를 뽑아 연합군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베냐민 지파에 들어가 기브아 사람들 곧 악행을 행한 불량배를 넘겨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절차일 것입니다. 악을 행한 자들,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그들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여인의 존엄한 인격을 무참히 짓밟은 자들, 그들이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지만 왜 그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사회는 정의보다는 혈연과 지연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총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보호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싸우기로 합니다.

사실 베냐민 이렇게 결정한 데는 이스라엘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브아의 불량배 여러명을 붙잡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은 베냐민지파 전체를 향해 무력으로 시위한 것입니다. 돌아가는 양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분노는 과격한 양상을 보이고 있고, 이에 베냐민 지파도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정적 결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군대를 소집하여 2만6천명이, 기브아에서 7백명을 모집합니다. 특히 기브아에서 선택된 7백명은 특전사에 해당됩니다. 이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은 사십만명이 소집됩니다. 
베냐민 2만6천7백명대 이스라엘 40만명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그렇듯이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의 대답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승리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베냐민지파를 치러 올라간 이스라엘은 기브아에서 패하고 맙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훈련된 군사들, 많은 숫자, 그리고 하나님의 승낙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패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여호와께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은 이 실패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울며 여호와께 묻습니다.
“내 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이들의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냐민과의 전쟁을 전제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베냐민과 전쟁을 할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갈까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한걸음 물러나 묻습니다. “하나님, 우리 형제 베냐민과 전쟁을 해야 할까요?”

 

이렇게 질문이 바뀌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들이 지금 상당히 감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무엇일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고 전쟁을 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동족인 베냐민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첫날 전쟁에 패하자 자세가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올라가서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다시 이스라엘이 패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1만8천명의 전사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스라엘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된 실패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들은 벧엘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올립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계속되는 실패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도 달라지셨습니다. 승리에 대한 약속을 하십니다.
28절 후반부에 보시면,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베냐민은 세 번째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진멸시키기 위해 총력전을 펼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두 진영으로 흩어져 전술을 펼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성을 지켜야 하는 군사들까지 합세하여 치러 내려온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지역은 산악지역이고 협곡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을 함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대전투가 그렇듯이 성문이 열리게 되면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가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기세가 등등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성문 안에 있던 군사들가지 합세하여 이스라엘 군을 향하여 진격해 나갑니다. 그 틈을 이스라엘 연합군 1만명의 복병이 기브아 성으로 돌격하여 성안에 남아 있는 군사들을 진멸합니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베냐민 지파가 도망치기 시작하였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진멸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베냐민 지파 진영으로 들어가 그곳을 초토화 시켜 버립니다. 군사들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자들, 여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합니다.
48절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여러분! 지금 무엇이 잘못되고 있습니까?
잘 보시면, 외형적으로 보이는 절차와 형식들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 총회로 모여 피해자의 진술을 들었습니다.
악행을 행한 기브아의 불량배를 수배하고 그들을 치러 갑니다.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는 절차를 진행합니다.
전쟁에 패하자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레위인의 진술만을 듣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립니다.
자신의 아내를 칼로 열두 토막을 낼 정도였다면 레위인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의 진술만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소탕할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군사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군사 사십사만명이 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이 너무나 감정적입니다. 물론 시신을 보고 냉정함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격분한 모습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그들을 불량배를 치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성읍을 타깃으로 잡은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의 분노는 여러 명의 불량배에게 보복하는 것으로는 모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다 죽입니다. 아이들, 여인 할 것 없이 성읍전체를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동족학살이 잔인하게 자행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전체가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심판하고 징계하려고 했던 불량배들. 그들의 그 추악하고 잔혹한 모습이 당시 특정된 몇몇 사람의 악행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세우려고 하는 정의는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정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세우려고 하는 자신이 정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실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정과 환경에 의해 움직입니다.
혈연과 지연에 의해 움직입니다.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 따라 정의의 기준이 움직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재 사법농단 사태로 전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법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함께 모여 불의를 심판하고 정의를 이루겠다고 하지만, 그 어떤 사회도 정의로운 사회를 이룬 것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번복되는 경우들을 우리는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모여서 결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풀었을 뿐입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한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이렇게 문제를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아간이 전리품을 도둑질 합니다. 그때 어떻게 됩니꺄?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하시냐 하면, 아간이 범죄했다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범죄하였고 나의 언약을 어겼다고 말씀하십니다(수7장).


한 사람의 범죄의 대가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범죄한 자를 색출하기 위해 한지파씩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게 하였고 결국 아간이 제비 뽑히고 그의 범죄가 드러나 그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호수아 7장의 기록을 보면 이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 안에 범죄를 해결할 때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였고 냉정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에 범죄를 해결하는 모습 속에서 전혀 질서가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형식은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과격하고 무질서하며 난폭하기까지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칼을 휘두르는 자들입니다.
정의는 총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때 언제나 그 결과를 처참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함께 모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하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인 좋은 것입니다. 각자 소견에 옳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옳음 또는 그름 정의 또는 불의의 출발은 대부분 나에게 출발합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혈연과 지연에 매여 있고 상황과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신뢰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을 때 그것이 정의입니다.
간혹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무자비할 수 있어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약을 설교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게 될 때 이미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정의를 실현하려고 할 때 내가 하나님 자리에게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정의가 없다고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정의롭지 않은데 무슨 정의가 없다고 탄식합니까? 세상의 불의를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비난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사람과 내가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냉혹하고 잔혹한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보며 분노했던 이스라엘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도서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우리가 의롭다라고 하면서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사람들은 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촛불을 들지만, 그것은 우리의 기대일 뿐입니다. 정권이 바뀌고 권력이 이동하면 정의는 또다시 뒤집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정의와 공의의 왕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6-7>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다시 오셔서 통치하시날 온전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하는 자들이기에 당장 세상의 불의로 인해 모욕과 핍박과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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