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9-10-29 14:17

에베소서 강해 38.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심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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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황 전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n6_LOqWkhY 

 

 

에베소서 강해 38.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에베소서 5:1-2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강해 38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을 보시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도가 전한 말씀 이 말씀처럼 위대한 권면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허물 많은 자들에게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피아노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베토벤처럼 되라, 쇼팽처럼 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신분만 아니라 이제 신앙에 막 입문한 사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물으면 대답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으십시오.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물으면, 하나님을 본받으십시오.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물으면, 이 또한 하나님을 본받으십시오.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윤리적 삶의 목표와 기준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 중에 하나도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받는 자’는 원어로는 ‘미메테스’이고 영어로는 ‘imitator’입니다. 모방자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이때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신중하게 의논하십니다. 과연 어떤 존재를 창조할지에 대하여 의논하십니다.


창세기 1: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우리”라는 표현은 당연히 삼삼위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십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신뢰할 만한 견해는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이 있습니다. 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피조물은 본능과 질서에 따라 움직이지만, 인간만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인격적 존재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강제하거나 억압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일지라도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를 강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과학자가 로봇을 만들고 그것이 단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그 피조물은 굉장히 탁월한 존재일 것입니다. 반면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를 반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탁월성으로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주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가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 보다 가치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본받은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즉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창조된 우리가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혹자인 악한 사단을 본받는 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썩어질 것들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며 이웃과 경쟁하고 착취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의 변화는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화의 과정의 종착점 또는 목적지가 어디인가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그 탁월한 영광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현실의 삶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할 때 하나님의 전능성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전능하니 너희도 전능하라 하지 않으십니다.
또는 하나님의 전지하심, 모든 것을 아심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비공유적 속성, 즉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으로 피조물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레22:32; 시22:3; 요17:1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말씀하시고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삼하12:24; 요일3:1)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도 의로움을 요구하십니다(사56:1; 빌3:9).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이게도 선함을 요구하십니다(출33:19; 시119:68).
하나님은 진실하시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도 진실함을 요구하십니다(출34:6; 시146:6).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적, 즉 피조물인 사람과 함께 나누시는 속성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할 때는 거룩함, 사랑, 의로움, 선함, 진실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속성을 본받아야 하는데, 본받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그 대상이 역사 속에서 활동했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너희가 거룩하라 말씀하셔도 우리는 거룩함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셔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본 받아야 할 대상을 역사 가운데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던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래서 본문 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결국 성경이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할 때는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엡5:2절>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희생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경을 통해 사랑을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랑하면,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을 감정으로 이해합니다. 황홀한 감정, 설레는 마음, 애타는 마음, 두근거림, 환희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C. H. Dodd라는 신학자가 내린 결론이 가장 성격적입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애정이 우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능동적인 의지의 결단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명령될 수 없는데 비해서 사랑은 명령될 수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배우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한 명대사가 있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아니요, 사랑은 변합니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하면 하루에 열두번도 변합니다.

박원의 <노력>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나 나옵니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되니”

사랑이 감정이라면 노력하는 것을 말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적 행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렇게 사랑이 감정이라면 성경에서 사랑하라는 명령은 잘못된 것입니다.
감정은 명령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슬퍼하십시오. 한다고 슬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십시오. 라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은 억지로 노력해서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행동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중에 감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두가 의지적 결단이고 행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상황과 감정과 상관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중에 우리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 감정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자매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원수가 애인이 되는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감정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되고 분노가 치밀어도, 꾹 참고 사랑하겠다고 결단하고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사랑의 행위를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의 놀라운 비밀은,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저는 저희 두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희수를 만났을 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아파트 문으로 들어서니 거실에 누워있는 희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태어 난지 40일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두 팔을 번쩍 올리고 자는 모습이 꼭 원숭이 같았습니다.

 

희수를 데라고 와 키우면서 사랑하는 마음은 잘 들지 않았습니다. 의무였고 책임이었지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사랑을 하다보면 사랑하게 됩니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합니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갈등에 애틋함이나 설렘도 사라집니다.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기도 합니다. 당연히 성격차이가 있을 것이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다른 부부와 비교하여 속상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그때 참 우리 많이 사랑했는데.

아닙니다. 그때의 사랑은 지극히 초보적인 사랑입니다. 반려견도 그 정도는 사랑합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20년 30년 살면서 사랑은 깊어집니다. 그동안 함께 해왔던 시간의 길이만큼이나 숙성되고 깊어진 것입니다.

 

수통골을 산책하다보면 가끔 제 마음에 감동을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노부부가 손을 잡고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내나 남편의 손을 잡고 산책한 적이 언제가 마지막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동안 함께 살았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꼭 표현해야만 사랑이 아닙니다. 그동안 함께 살았고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러한 의지적 행동의 사랑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희생적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주먹을 휘두르는 패역한 상태에서 사랑하셨습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그리고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고 그 큰 사랑으로 죄인들을 가슴에 안고 십자가에 죽으사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을 것을 원하시고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5:1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 희생적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너희도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아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핵심은 희생입니다.
엡 5:2절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사”
사랑은 철저하게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의 물질, 시간, 건강 등 자신의 것들을 상대를 위하여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자녀를 위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있어도 자녀를 위해 아껴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삶은 죽음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희생의 죽음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 아닙니까?

희생적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희생한 만큼 축복을 누립니다. 이렇게 희생하기 위하여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희생도 줄 것이 있어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하지만, 남에게 베풀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땀흘려 일하는 이유도 남에게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희생하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합니다. 능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고자 할 때 주머니가 넉넉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대학가고 성공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하십니다. 이를 위해 능력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건강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살 때 우리 삶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마쳐질 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내가 이룬 성공이나 은행잔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삶의 흔적들입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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