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9-07-24 10:39

에베소서 강해 25. 교회를 위한 기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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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황 전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3RD8NkYf48 

 

교회를 위한 기도

 

에베소서 3:14-19
14.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기도합니다.

그동안 바울은 에베소교회에게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말씀은 항상 기도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기도가 함께 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갈 때 우리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 집니다.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신앙의 기초이기에 말씀중심의 신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기도로 연결되어 질 때 비로소 우리 삶에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을 증거하는 일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일에도 전념했습니다. 바울뿐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신실한 선배들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과 함께 기도하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떠올리면서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하며 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기도했던 그 내용들을 정리하여 이렇게 편지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를 통해 배우는 첫 번째 내용은 바로 기도의 대상을 부르는 방식과 기도의 자세입니다. 
<엡3:14-15>“14.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 등 각자 다를 것입니다. 기도는 대부분 누군가의 기도를 듣고 배우게 되는데 아마도 각자의 신앙의 배경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기도의 대상을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의미없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과 나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나 기도자의 자세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나가는 아이가 저에게 “아저씨 이것도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저희 교회 중일학교 “아이가 목사님 이것 좀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저의 아이들이 ”아빠 이것 좀 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저씨와 목사님이라는 관계가 요청하는 자세나 요청할 수 있는 내용을 한정 짖습니다.  

아저씨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과 목사님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과 아빠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요청하는 자세도 다를 것입니다. 아저씨에게 투정이나 조를 수는 없지만 아빠는 다릅니다. 때 쓰기고 하고 재롱도 부리고 매달리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늘과 땅에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통치권과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은 상위 권위자로서 그 사람에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말하는 것이고 그 중에 인격적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그것에 소유권과 지배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우주만물 속에 에베소 교회가 포함되고 그곳에 모인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이 속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창조주이시며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며 바로 우리 각자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기도라는 것은 그 피조물 중에 미미한 내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위대한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청하는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앞부분이 하나님의 전능성과 초월성을 의미한다면 아버지라는 것은 인격성과 내재성을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기도하는 바로 이 자리에 내 곁에 계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달랐습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리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전능하고 거룩해서 함부로 그 이름조자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대필할 때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손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감히 우리의 더러운 입술에 올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니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아버지라는 의미보다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 이전의 모든 문서를 뒤지면서 혹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언급한 문헌이 있는가를 조사하였지만 단 한건도 찾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아빠 되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세상에 악한 아버지들도 자식들에게 좋은 주고 싶어 하지 않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죄의 값으로 치루시고 우리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휘오데시아’ 입양하셨고 그분의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입양자녀의 가장 큰 축복은 아버지가 생겼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가 가진 모든 자원들이 그분의 선하신 뜻에 따라 축복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축복의 산물을 자녀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 누리는 수단이 바로 기도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모든 축복의 자원을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모든 풍성함을 이 땅에서부터 받아 누릴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수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하나님은 인격적인 친밀함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로서만 계시다면, 때로 우리가 기도할 때 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국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나의 바람과 뜻을 아뢰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부분을 묵상할 때 이런 생각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기도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로만 말씀하지 않고, 친밀한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아버지께 때로는 철없는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 자녀의 수준에서 그것이 최선일 때가 있고 그것을 구하고 받아낼 때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어린이날에 희수가 농구공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내와 저는 사줘봐야 가지고 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주었습니다. 예쁜 포장지에 싸서 풀어 보게 하였습니다. 포장을 푸르고 농구공을 손에든 희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농구공을 잠시 가지고 놀았고,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빠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  때로는 조르기도 하고 징징거리기도 하며 투정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외감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아버지께 달려가 안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성경에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뜻을 돌리키셨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진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합니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32:12)
그러자 출애굽기 32: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출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전지 전능하셔서 그분이 세우신 뜻은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운 뜻은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질서나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식대로 움직여지지만 하나님은 인격이시기에 우리가 조르고 매달리고 투정부리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 분 앞에 나갈 때 경외함과 친밀함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앞에 바울은 어떤 자세로 기도하는가?
15절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 당시에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당시 종의 복종의 자세입니다. 또는 권위자에게 간절하게 무언가를 요청할 때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간절함과 복종의 자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이기에 간절할 수 있는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복종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교회는 마루가 아니라 기도시간에 무릎을 꿇는 것이 어렵지만, 간끔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따라 자세가 바뀌기도 하고 자세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질때가 있습니다. 서서 기도하거나 앉아서 기도하는 것 보다 무릎을 꿇을때가 더 간절해 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간절함과 복종함의 자세가 요청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구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가장 선한 뜻으로 수용하고 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 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이가 심각한 질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됩니다. 이때 다윗은 아이를 위하여 기도를 시작합니다.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합니다. 걱정이 된 왕궁의 어른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하지만 다윗은 식음을 전패하고 엎으려 기도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칠일만에 죽게 됩니다. 왕궁의 신하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기 싲가합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들으면 크게 상심할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다윗이 신하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들이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음식을 들여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신하들이 묻습니다. 아이가 살이있을 때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삼하 12:22-23>
22.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최선임을 수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의미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면서도 동시에 그 응답에 대해 복종적인 자세로 기도하는 것, 이것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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