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9-04-30 15:32

에베소서 강해 17. 구원받기 전 우리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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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7. 구원받기 전 우리의 상태

 

에베소서 2:1-3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강해 17번째 시간입니다.
1장에서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성삼위 하나님께서 베푸신 신령한 복을 말씀하였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예정하셨지요. 우리를 택하시고 그의 자녀 삼으시기로 작정하시고 우리의 삶을 섭리하시고 계시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자신의 피로 속량하시고 죄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복음을 들을 때에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삼위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은 그의 영광을 찬송케 하려는 목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이제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은혜를 받았고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습니다.
1절에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는 죽음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죽은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에서 뽑힌 순간 나뭇잎도 있고 열매도 있지만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잠시 자기가 가진 생명력으로 살겠지만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순간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에서 분리되어 우리 자신이 가진 생명력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생명인 것입니다.

 

지난 주 부활절 꽃꽂이를 아름답게 했었습니다. 흰색 장미와 백합으로 참 아름다웠지요. 그러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시들어갔고 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꽃은 잘려진 순간 죽은 것이죠.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죽은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어떤 이들은 풍족하고 화려한 삶을 살죠. 그러나 죽은 삶입니다. 금세 시들고 말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은 것입니다. 
아무리 젊고 아름다워도 이 또한 죽은 자입니다. 금세 시들고 말 것입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인간들은 나름 구원을 향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죽은 새가 날 수 없듯이 인간들이 나름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것들은 헛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죠. 어떤 이들은 자기절제와 수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두 번째,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며 살았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그 가운데서 행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죽음의 상태에 있으면서 세상 풍조를 따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악된 인간들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해 낸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인간의 죄와 그로 말미암은 죽음이라는 현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시대에 따라 풍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 풍조입니다.

오늘날 세상 풍조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쾌락주의입니다.


바울은 말세의 사람들을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딤전 3;4>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인류역사상 쾌락주의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가 ‘에피큐로스학파’입니다. 이들은 가능한 많은 쾌락을 취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습니다.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육체적 쾌락을 선으로 추구하여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에 치중합니다. 인생은 결국 죽으면 끝이니까 살아있는 동안 많은 것을 누리자고 말합니다. 

여행이나 취미생활 같은 건전한 쾌락에서부터 술, 마약, 섹스와 같은 저급한 쾌락에 이르기 까지 더 많은 쾌락을 위해 살아갑니다.

 

또 한 부류는 ‘스토아학파’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쾌락은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는 삶의 방식을 취했습니다. 또한 지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의 삶의 특징은 금욕주의였습니다. 순간적인 육신적 쾌락을 절제하고 보다 고상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행이나 종교생활 등으로 지적 깨달음과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세상풍조는 배금주의입니다.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돈을 인생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두는 것이죠. 이것은 쾌락주의와 연결되어 인생의 쾌락의 기반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져야 내 삶이 더욱 풍요로워 질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돈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 일이 어떠한 일이고 어떤 유해가 있는지 보다 얼마만큼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려들어 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개념보다 경제적 이익이 우선인 것입니다.
배금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면, 사람도 돈의 가치로 판단하죠. 나보다 돈이 많으면 갑으로 여여 고개를 숙이고 돈이 없으면 을로 대하고 무시합니다.
내가 불행한 것도 돈이 없어서이고, 돈만 많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죠. 경제문제만 해결되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경제적 가치에 윤리나 도덕은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세 번째 세상 풍조는 인본주의입니다.
최근 인본주의는 인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인권이란 명목으로 낙태죄를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대법원은 낙태죄가 헌법에 불합치 하다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뱃속의 태아의 생명권보다 무겁고 중요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남녀가 자유롭게 성관계를 하고 책임지지 않겠다는 풍조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성별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젠더 이데올로기 또한 인권이란 이름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뿐만 아니라 제 삼 제 사의 성도 존재하고 이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리고 그것을 법제화 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동성애라든지 트렌스젠더 게이 호모 등에 대해 교육하여 차별하지 말자고 주장하죠. 장애인이나 외국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취지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고 좋은 일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죄를 조장하는 행태인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풍토가 급속하게 번져가고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이러한 것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구원전의 우리의 상태가 무엇인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는 것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대항하는 영적인 존재죠.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귀신의 왕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왜 사단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말하는가? 공중은 영적인 영역으로 사탄의 활동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사탄에 끌려 다녔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단을 따라가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사를 해도 손 없는 날 하는 하죠. 손이라는 것이 귀신을 의미하죠. 그것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사고나 질병에 자주 걸리면 묏자리를 잘 못썼나. 굿을 하기도 하고,
전에 식당 개업하신 분 심방을 갔는데 흰색 실에 북어를 걸어 놓으셨어요. 이전에 가계하신 분이 매달아 놓은 건데 꺼림칙해서 건들지도 못한 것입니다. 사다리를 갖다 놓고 빼드렸어요. 거기 만 원짜리가 몇 개 들어 있더라구요.

 

창원에서 신혼집을 구했는데 거기도 북어가 달려있었어요. 아내랑 신나서 돈이 나오면 맛있는 것 사먹자고 했는데 없더라고요.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움이 많아요. 

결혼한다고 하면 사주팔자 보고, 궁합을 보죠. 어떤 분은 부적을 옷에 붙이고 다니시는 분도 있고, 점쟁이한테 들은 말에 평생 자유롭지 못한 분도 계세요.

이렇게 귀신에 끌려 다니면서 하나님은 없다고 해요.
아니 귀신은 있고 하나님은 없다는 것은 무슨 논리입니까? 죽으면 다 끝이라고 하면서 장례식때 향은 왜 피우고 목탁은 왜 두드리고 절은 왜 합니까? 그리고 해마다 정성스럽게 제사는 왜 지냅니까?
그리고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전에 분당을 차를 타고 가는데 분당 판교 지역에 첨단과학 단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건물을 완성한 것 같은데 양복 입은 직원들이 주차장에 30-40명 모여 있는데 뭐하는가 보니까 돼지머리 올려놓고 절을 하고 있더라고요. 양복 입은 엘리트들이 절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참 우습기도 하고... 그분들이 연구원들 과학자들 아닙니까?

 

여러분!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공중 잡은 권세인 마귀에 얽매어 살았던 것입니다. 

 

네 번째,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상태는 죄악된 본성을 따라 살았습니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육체와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의미하죠. 우리 존재 자체가 욕심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존재였다는 것이죠. 이기적 본성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배웠거나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악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성적인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인류를 물로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의 마음의 계획한 바가 어려서부터 악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실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교사죄를 범한 후 나단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며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그저 죄를 점점 쌓아놓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죠.
100세 200세 산다고 해도 결국 죄를 더 많이 짓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간혹 갈등의 순간에 이런 조언들을 하죠. “너 마음 가는대로 해”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갑니까? 대부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죄로 향합니다.

결국 이러한 네 가지의 모습이 구원받기 우리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창조주를 반역한 피조물을 향한 적절하고 필연적인 반응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진노하시는가라고 따집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의 사탄의 인간을 유혹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던 사단의 유혹을 기억할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해도 하나님은 심판하시지 않을 거야 라고 유혹한 것이죠. 이것은 아주 교활한 유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죄든 쉽게 짓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 까지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다룰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만큼 무섭고 두려운지를 알 때 우리 가운데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경제가 아닙니다.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고 모든 것이 다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교육도 아닙니다. 사람이 최고의 인격적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이 선해지거나 사회가 정직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정치가 아닙니다. 정치인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최고의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운영한다고 해서 악과 고난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집은 남편이 문제야 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이기적인 남편만 변화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해 질꺼라고 생각하나요?
우리 집은 아이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녀들이 부모말에 순종하고 공부도 잘하고 하면 문제가 없을까요?
우리 집은 돈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남편이 매월 충분히 생활비를 주고 통장에 돈도 좀 쌓아놓고 노후도 준비하고 여가도 즐기면서 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근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둘이 살면서 힘들 일이 없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둘 다 건강하니 벌면 되고, 또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결혼해서 갈등이나 다툼이 거의 없었습니다. 서로를 자극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런 가정이라면 아이를 키우면 참 행복한 아이로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나 둘 다 마음도 몸도 건강하고 둘 사이고 좋으니까 잘 키울 수 있을꺼라고 판단 했습니다.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아이가 오자마다 힘들어 졌습니다. 세상에 자극도 이런 자극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자극을 받습니다. 참죠. 새벽기도때 받은 은혜로 출근 전까지 참고 버팁니다.
집에 오면 또 다시 자극이 시작됩니다. 제가 원하는 퇴근의 모습은 아이 둘이 달려나와 아빠 다녀왔어요? 인사를 받고 안고 뽀뽀도 해주고 부엌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오늘도 수고 많았지 격려하고...
아닙니다. 돌아오는 순간 이 모든 기대는 무너지죠. 아이들은 엄마가 그동안 엄마가 받아주지 않았던 짜증을 저에게 내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이미 지쳐 있을대로 지친 모습으로 제가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죠. “의성이 기저귀 빨리 갈아죠. 오늘 내가 다섯번 기저귀 갈았어.”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이방 저방 다니면서 치우고 씻기고 그러면서 서로가 짜증난 상태에서 이젠 작은 자극에도 고함도 지르고 아이를 감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하죠. 잠잠해지면 또 다시 자괴감에 내가 왜 그랬을까?
이제 다섯 살밖에 안됬는데....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또 다시 반복합니다.

 

아내가 얼마 전부터 아이 때문에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둘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아이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저의 연약함고 부족함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주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문제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면 안됩니다. 아무런 도움도 해결도 되지 않습니다.
환경 탓하고 사람 탓하고 그래서 여러분 변한 게 있나요?
아니요. 내가 문제입니다. 나의 죄가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렇듯 우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알고 파악할지라도 우리 안에 해결책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진노의 자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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