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9-06-12 11:57

에베소서 강해 20.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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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0.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에베소서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이며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죠.

기독교가 중세시대 타락했을 때,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얻는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때 마틴 루터는 세가지 다음의 세가지 정신을 주장하며 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Three Solas’라는 말로 잘 표현되는데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 (오직 은혜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여기,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정신을 담았습니다.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 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찌하던 자신의 구원에 어떤 역할을 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도 협력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이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누가 보아도 종교적으로 신실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 운동은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거룩함을 실천해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을 구약의 율법을 세분화 하여 철저하게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마23)하며 냉혹하게 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을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으며, 마귀의 자식이라고 질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당시 부당하게 세금을 부과하여 호의호식하던 세리와 자신의 몸을 팔아 먹고 살던 창기들을 환대하셨던 주님 아닙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냉혹한 모습이 당시 종교권력자들의 심기를 건드려 십자가를 지게 한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입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죄로 물들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배운 사람이고 교양도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너희도 똑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나름 노력하여 선한 행위들을 쌓아간다고 해봅시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또 종이에 써서 머리에도 붙이고 다니고, 정한 시간이 되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주변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구제도 하고, 3일에 한 번씩 금식하며 또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 우리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이러한 행위들로 인해 자신들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자신들이 진짜 의롭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외식한다고 정곡을 찔렀던 것입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는 뜻입니다. 

너무 진지하게 연기한 나머지 그 배역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마23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리관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몇 가지만 추려보았습니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들은 정의가 아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움직였고, 긍휼보다는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들의 겉모습은 분명 선하고 거룩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함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함을 외적인 거룩한 행위로 포장했고 지속적으로 행하면서 자신도 속아버린 것입니다.

 

<마 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 노릇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신앙인들 가운데 이런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당사자들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러했는가? 심판의 날까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라가라”입니다. 자신의 모습에 자신도 속은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하죠. 첫 번째,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놀라고, 두 번째,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있어서 놀라고, 세 번째, 내 자신이 있어서 놀라고.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말하면 격분하고 분노합니다. 왜 그럴까? 은혜라는 것을 받기 위해서 내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구원에 있어서 무능력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외치던 자들이 불과 며칠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도들로 변한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인격도 있고 교양도 있고 그동안 누구에게 피해 준 일도 없고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때때로 좋은 일도 많이 해서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십니까?

누가복음 18장에서 장에는 삭개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17: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리는 자신의 죄인됨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죄사함 받고 그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여 의롭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 비유 뒤에 어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거하지 말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
관리가 대답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네게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성경은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보다 쉬우니라”

 

예수님 당시 부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재물의 축복을 받은 것은 선한 행실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자들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 관리 안에 있는 탐심의 죄를 들추어내신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단지 그의 부함 때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부자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갈 수 없는 곳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자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26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인간 편에서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9장에 삭개오가 등장하죠.
삭개오는 당시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입니다. 부자 관원과는 대조됩니다. 부자 관원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였고 관리가 되었으면 또한 부자입니다. 그 누가 보다도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는 천국에 가장 합당한 사람입니다.
반면 삭개오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 정부에 빌붙어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하였고 폭리를 취하여 그것으로 부를 누린 자입니다. 그 누가 보아도 죄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성경은 그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파티를 즐기셨습니다. 함께 음식을 드렸고, 포도주를 드셨으며, 환하게 웃으며 그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을 수군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파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입니다
삭개오가 중대 발표가 있다며 모두의 주의를 모읍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율법은 속여 빼앗은 것의 두 배를 갚으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네 배를 갚겠다는 율법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또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이 또한 율법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보시면서
“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가 선행을 약속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구원에 있어서 이 과정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죄인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죄인이다 회개해야 한다. 등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거하시면서 기쁨의 잔치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죄인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율법을 능가하는 선행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삭개오가 주님 앞에 약속한 것을 들어보면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든 갚으려는 자발적인 행동을 봅니다. 그는 자신이 누린 부가 누구의 것을 빼앗은 것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네 배로 갚겠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아야 사람이 변화됩니다.
사람을 바꾸는 힘은 은혜에 있지 탁월한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그를 회개케 한 것입니다. 회개는 메타노이아!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아닙니까?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유턴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된 것이지, 나의 어떠한 때문에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로 인해 가슴을 치는 세리의 자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삭개오처럼 자신의 모든 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족함이 없고 외롭고 삶의 허무하고, 무의미함을 깨닫는 자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2장으로 가겠습니다. 
8절에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9절에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나도 그와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와 다른 것은 나에게는 은혜가 임한 것이죠. 그에게도 은혜가 임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전에 말씀드렸죠.
“포이에마‘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시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선한 일은 바로 예수 안에서,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푸신 은혜 안에 있을 때 자발적으로 나오는 선행인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또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선행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선행입니다.

이러한 선한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삭개오를 찾아 오셨듯, 허무한 인생 가운데 살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길 기뻐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때 그런 잘못을 했냐고? 왜 그렇게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했냐고, 왜 그렇게 사랑이 없었냐고? 왜 그렇게 욕심을 내며 살았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네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배실황 전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vWd_EbEa1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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