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9-02-12 12:57

에베소서 강해 7. 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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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7. 속량

 

에베소서 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강해 일곱 번째 시간으로 ‘속량’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이유는 단지 부부가 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축복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아들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구원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들어가기’와 ‘거하기’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주권과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로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싶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길 기뻐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자녀들과 함께 거하실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길 위해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강아지를 아무리 사랑해도 강아지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길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길 너무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우리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3: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에 우리가 성전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건축이나 성전봉헌 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이러한 관계들의 핵심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길 원하시는데 이러한 관계를 깨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과의 아름답던 관계를 깨어버린 것이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이후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출생한 모든 인간은 역시 죄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워야 할 빈공간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 이 공간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사람과의 관계, 쾌락 등을 통해 채우려고 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의 상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비참한 지경으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던 아름다운 삶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되었고 이웃과는 치열하게 경쟁하여 강한 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동물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 속에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서 단절된 인간은 한치 앞의 일을 알 수 없어 늘 불안하고 염려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서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그것의 증상인 온갖 질병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는 죄의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경제가 나아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까요?
교육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지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예전에 비해 지금이 훨씬 진보하였고 좋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비참한 현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비참한 현실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출생하여 죄악 가운데 살다가 죄악 가운데서 죽어갑니다. 죽음 후에 남겨진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까?
우리가 죄인이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고 이제 우리 안에 성경께서 거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들과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어둠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시면 산산이 분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하심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임하실 때 성령으로 임재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는 떠나십니다. 더 이상 함께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입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셨지만 불순종의 삶을 살 때 성령께서 떠나셨습니다. 이것을 다윗이 곁에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았던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이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난 이후 그가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51:10-11>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성령님이 떠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간헐적으로 임재하셨던 성령님이 이제는 그의 백성 가운데서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의 자녀들이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를 범하고 넘어질 지라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6-18>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너

희와 함께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속량이라는 단어가 이것을 설명해 줍니다.
속량은 원어로 ‘아폴뤼트로시스’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노예 시장에서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짐승처럼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대물림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노예면 자녀들은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간혹, 빚을 갚지 못해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친족 중에 하나가 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노예를 삽니다. 그리고 그를 자유인의 신분으로 해방시켜 줍니다. 이때 사용하던 단어가 속량이라는 단어입니다.

값을 지불하여 노예를 사고 그를 해방시켜 줄 때 그 값으로 지불한 돈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본문 7절에 보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로마서 6:17>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우리의 신분이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죄를 범해서 죄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죄짓는 자리로 끌고 다녔던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죄를 범했고 그것을 탐닉했습니다.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속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루시고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치르신 값이 무엇입니까? 아들의 핏 값으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고전6:19-20>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5:9>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천상에 있는 우리 성도들이 새노래로 찬양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예수님의 핏 값으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로마서 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무런 값을 치루지 않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회중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 염소 두 마리를 제자장에게 끌고 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죄를 염소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는 칼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제단아래 뿌리게 됩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사함을 얻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마리의 염소는 광야로 보냅니다. 그래서 다시는 찾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속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제사를 예표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모든 저주와 심판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시키시고 죄인들을 손을 빌어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골로새서 1:13-14>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목걸이나 귀걸이로 달고 다니며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지만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곧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거나 말하기도 꺼림칙한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일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눈물이 핏물이 되도록 기도했던 것이, 바로 “아빠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하고 싶었던 잔은 십자가의 육신의 고통뿐만이 아닙니다. 잔이라는 것은 구약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선지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실 때 큰 대접에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있고 그것이 부어지면서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 심판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성삼위 하나님이 누리시던 그 사랑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리에 선다는 것이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도 피하고 싶어 던 것입니다. 그만큼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입니다

.

그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핏 값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제물이 되시고 값으로 내어주신 분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에베소서에서 그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6절에 보니까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들렸던 소리가 이것입니다.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서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의 죄를 사하고 자녀삼기 위한 속량의 값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이미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게 번제로 드리는 사건을 통해 실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을 된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 아들의 핏 값을 통하여 속량하사 우리의 죗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이 치르신 대가는 그분의 가슴에 잊히지 않는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가 누구기에 하나님께서 그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풍성한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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