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9-03-26 12:42

에베소서 강해 13. 하나님을 알게 하옵소서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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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3. 바울의 기도 2/ 하나님을 알게 하옵소서

 

에베소서 1:17-19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기도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바울이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바울의 에베소 성도를 향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말씀 사역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골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시고
<몬 1: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이렇듯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자신이 전한 복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그는 새로운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과 연관하여 기도를 합니다. 오늘 등장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전한 성삼위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전한 그 은혜가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8-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리고 본문 17절의 기도를 보면,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가운데 된 것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사 그의 자녀를 삼은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된 것이죠.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편에서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굳이 내가 기도하는 것이 뭐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 부분이 개혁주의가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너무 강조하니까 인간의 책임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까지 이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면, 자기 맘대로 살아도 결국 구원받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인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말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 즉 우리가 구원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결국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시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셔서 결국 그 구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협력하여 구원을 이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가운데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 그리고 그분께서 베푸신 전적인 은혜를 언급하고 나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입니다. 그렇다면 기다리면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축복과 은혜가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기다리면 되느냐? 그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도를 수단으로 삼아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단 세 가지 말씀드렸지요? 말씀, 기도, 성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가장 대표적이고 정당한 방법이 이 세 가지입니다. 그중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가운에 그 은혜가 임하지만 다시금 은혜 받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기도내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기도하십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NIV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you may know him better”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하옵소서. 원어로는 ‘에피그노시스’인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 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 또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는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 세상은 이렇게 혼탁하고 악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공부해서 아는 지적인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격적 만남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실 때 신학공부를 해서 아는 분으로 알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관계를 맺으시고 그 관계속에서 자신을 알리십니다.
자신이 어떤 성품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를 향한 어떤 뜻과 계획은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체험적이고 경험적으로 알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존재를 알 때 어떻게 알아 가십니까? 아마도 이 땅에서 내가 누군가를 가장 잘 안다고 할 때는 배우자이거나 자녀일 것입니다. 인격적 존재를 알아가는 것은 함께 살면서 알아갑니다. 제가 희수에게 아빠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저도 희수와 3년 3개월을 살았는데 아직 잘 모릅니다. 서로가 알아가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면서 알아갑니다. 제 아내가 저를 아는 것도 함께 살면서입니다. 결혼 초에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인격적 만남과 관계를 통해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입양 과정 가운데 여러 가지 조사를 받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부부관계가 원만한지에 대한 것입니다. 조사관이 제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남편이 목사라 여자 성도와 접촉할 기회가 많은데 혹시 그런 부분에 있어 걱정스러운 부분은 없습니까?
제 아내가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처음 결혼했을 때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제가 나중에 아내에게 들었는데 한동안 저에게 말도 안하고 냉랭하게 대할 때가 있었거든요. 제가 심방하고 핸드폰 걸이를 선물 받았는데 거기 영어로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걸 어떤 여자성도님이 준걸로 오해한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쇼핑몰을 시작한 청년이 자기 사업장 이름을 새겨 개업선물로 준 것이거든요. 그걸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이상 살아보니까 이젠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하시고 그곳에서 너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분이 얼마만큼 신실한 분이신지 그분의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것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거짓말을 하게 되죠.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너의 후손을 별과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후처를 통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가 창세기 12장에 부름을 받는데 21장까지 오는 동안 그의 모습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과 노력과 의지와 지혜로 살아가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시고 긍휼과 사랑으로 인도해 내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점점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창22장에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는 말로 안 되는 명령을 받고도 하나님이 어떠한 하시는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순종의 자리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순종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것에 대한 굳건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죠(히11:6).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지식과 그것에 대한 굳건한 신뢰 인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당연히 신뢰하지 못하고 결국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는 신뢰와 순종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알고 있거나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인격적 존재를 체험적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도 믿고 떤다고 말합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압니다. 귀신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압니다. 성자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도 압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심도 알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것도 압니다. 그러니 믿고 떤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분을 신뢰하고 결국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친다고 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귀신도 믿고 떨기 때문이죠.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누가보아도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조차도 칭찬할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허용아래 사단으로부터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욥이 생각했던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특한 삶을 살면 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심판하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의 시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하여 세 친구가 너희 고난은 네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책망에 대해 그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말도 맞는 것 같지만 틀립니다. 그들도 여전히 인과응보의 틀에서 삶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로 내 삶이 전개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해 내 삶이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욥이 자녀를 다 잃고 아내까지도 저주하고 떠나 버린 그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식화 시켜 이렇게 살면 이렇게 반응하는 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수많은 말의 잔치가 끝나고 욥기 38장에 하나님께 말씀하시죠.
<욥 38:2-4>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 때에 네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우주의 시작조차도 모르는 자들아닙니까?
우리는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이죠.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여도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주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그분께서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욥 40:7-9>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이러한 하나님의 질문 앞에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죠. 이것은 지식으로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욥기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일순위가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여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사기에서 살펴보았던 입다입니다. 그는 열정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하나님!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 나를 첫 번째로 반기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그의 승리합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집에서 달려 나오는 사람을 보게 되죠. 소고를 두드리고 춤을 추며 그를 반겨 나오는 사람, 그는 자신의 무담독녀 딸이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에 대한 서원을 지키려 그를 결국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비록 서원했을지라고 돌이킬 때 이해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우상을 섬기는 문화에 혼합되어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른 순종을 할 수도 없고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열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열정은 있지만 바른 지식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신뢰는 아름다운 순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길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 삶에 동행하시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길 원하십니다. 구약의 성도들을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고 삶에 개입하시면서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류 역사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자들, 그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성경으로 묶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신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을 알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고 위험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였던 그 은혜와 섭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마침내 신실하게 지키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오늘날도 여전히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오늘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동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의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신실하심을 알아갑니다. 그것이 단지 머리에 남는 지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삶에 그 신실하심은 여전합니다. 그것을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이러한 인격적 만남을 통해 체험적 경험적 지식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고 순종의 자리로 인도하며 마침내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전체 실황

https://www.youtube.com/watch?v=uTdYbc9y7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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