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9-07-23 12:31

에베소서 강해 24. 분열과 차별을 넘어 하나되게 하는 복음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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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황 전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c9ZSkMS_1IM

 

에베소서 강해 24. 분열과 차별을 넘어 하나되게 하는 복음의 능력

 

에베소서 3:3-12 

3.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비밀이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3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4절에 “그리스도의 비밀”
9절에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

비밀은 원어로 ‘뮈스테리온’인데 ‘감추어진 것’, ‘비밀’ ‘신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밀인가? 그것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비밀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에베소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각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신비적 제의나 지식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입문자들에게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닫혀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에베소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비밀이라는 단어를 통해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만 알려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게 된 것은 큰 특권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만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한다고 해서 이 비밀이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시고 영적인 눈을 열어주셔야만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각 사람에게 이 비밀을 알리시는가?
5절에 보면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8-9>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셔야만 그 비밀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과 18절에서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죠.

 

<에베소서 1:17-18>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즉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면 지혜를 주시고 계시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알려주신 복음이 비밀인데, 본문에서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이 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둘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며 하나님 또한 자신들만의 하나님 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율법도 없고 성전도 없는, 그래서 결국 하나님도 없는 개와 같은 인생들이라고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의 눈이 열려 복음을 깨닫게 되니까 무엇을 발견했는가 하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말씀은 2장 12절의 말씀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전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던 이방인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막혔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이제는 민족과 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함께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6절에 “함께”라는 단어를 반복해 사용하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상속받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모든 풍요함입니다.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약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축복에 대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구원, 영생, 의로움 등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은혜의 축복을 차별 없이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떠한 민족에게 국한된 분이 아니죠.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의 백성을 모으시기 위함이었지, 그들만을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그의 백성들을 하나가 되게 합니다.
죄의 역사는 분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분리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자신과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로 하나로 만들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장벽을 허물어 하나로 만듭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이고 능력입니다.

세상에는 차별이 존재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국 사회는 보이지 않는 계층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차별적 인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분양아파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와 경계가 없어 높은 담장을 설치하여 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이 멀어졌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정규직직원과 비정규직직원은 분리되고 엄연히 차별이 있습니다. 지역간에 분리와 차별이 존재합니다. 학력에 따른 차별도 있습니다. 비행기만 타도 분리와 차별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퍼스트클래스와 비지니스석 그리고 이코노미석)
2015년부터 수저계급론이 등장했습니다. 금수저 은수저를 들먹여가며 부모의 자산과 소득 수준에 따라 자녀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생의 클래스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분리하고 차별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세상이 만든 좀 더 높은 클래스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바울이 살던 1세기도 지금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 상전과 종, 권력자와 시민, 귀족과 평민, 부자와 가난한 자가 뚜렷이 구별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계층간의 이동은 거의 없었고 부나 가난이 자연스럽게 세습되던 시대였습니다. 아버지가 목수이면 아들이 목수가 되고 아버지가 빵장수이며 아들도 빵장수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경우에도 이러한 차별적 문화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여인의 뜰, 이방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조차도 차별적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 모든 장막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계층의 벽을 뛰어넘고 차별이 사라지고 모두가 한 형제와 자매로서 교회에 소속하게 된 것입니다.

로버스 뱅크스라는 호주의 작가가 쓴 1세기 예배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작년에 독서모임 때 함께 나눈 작은 책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 자료에 기초하여 당시의 예배의 풍경을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회당에서도 모였지만 주로 집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문화도 그렇지만 상석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당시 문화적으로 볼 때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상석에 앉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집에 도착하자 그런 것에 상관없이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과 노예가 거리낌 없이 한 공간에 모여 성찬을 나누고 교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는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 중에 기독교인이 몇 분계십니다. 그때의 일화입니다. 이**대통령이 서울의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입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몇 명의 비서진이 먼저 들어와 예배를 진행하던 목사에게 묻더랍니다. 목사님, 각하를 위한 자리는 어디입니까? 목사님이 약간 당황하다가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각하는 빈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불과 100년 교회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자리를 앉았습니다. 상전들을 위한 자리와 노비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랬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모습은 금새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존엄한 주의 백성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차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화는 전에 한번 드렸던 것 같은데

대전신학대학교에 가면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인 고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 목사는 가난한 고아요 머슴이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을 극복하고 분열 이전의 장로교단 총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한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목사는 1882년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납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떠돌며 행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떠돌이 소년이었습니다. 이 목사가 인생 역전의 동반자인 전북 김제시 대지주 조덕삼씨를 만난 것은 17세 되던 해였습니다.

조씨는 자신의 집에서 마부馬夫로 일하며 틈틈이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공부를 하는 이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봅니다. 이들 사이의 인연이 더욱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면서 부터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이들은 미륵불교의 본산이자 증산교의 발생지인 모악산 기슭 김제 금산(팟정이) 마을에서 1905년 10월 11일 집주인 조덕삼과 머슴(마부) 이자익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곳에 이 두 사람이 합심하여 1908년에 세운 27평짜리 금산ㄱ자 예배당이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이 한날한시에 세례 받고, 같이 성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창립멤버가 되고, 같이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1907년, 두 사람은 함께 교회의 영수(집사급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입니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습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말하기를,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조덕삼 영수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습니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로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에 충성하였습니다. 교인들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조덕삼 장로의 이런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이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왔을 때에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정중히 모셨습니다.  물론 이자익 목사가 신학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물질적으로 도운 것은 조덕삼 장로였습니다. 이 조덕삼 장로가 바로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입니다.

마부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장을 세 번 역임(13·33·34대)했을 뿐 아니라, 장로교(통합) 노회장을 수차례 지냈으며, 20여개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대전시 오정동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대전노회를 신설하여 대전신학교 초대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오정교회 초대당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고 연약한 시골교회를 지켰던 농촌목회자였으며, 입각(入閣)을 권유하는 친구 목사 함태영 부통령의 제의를 “장관보다는 목회자로 종신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목회자로 종신할 것을 선언했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진 목사였으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고 창씨개명에도 불참했던 지도자였으며, 정치흥정에 흔들림 없이 교회헌법과 회의규칙에 정통한 깨끗한 교회정치가였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인생을 정리해야 할 70세의 고령에도 대전노회와 장로회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교)를 설립한 열정의 목사였습니다. 

2005년 4월 19일, 대전신학대학교 설립자이신 이자익목사 기념현판식과 이자익목사 전기 출판식이 있었습니다. 이 날 행사에 조세형 장로가 축사를 하게 되었고 인사말은 이자익 목사의 손자인 이규완 장로님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규완장로님은 대전 제일교회 장로로 한국 고분자화학에 크게 기여하시는 훌륭한 분입니다.

인사말을 하러 나온 이규완 장로님이 갑자기 조세형 장로 앞으로 나아가 허리를 굽혀 큰 절을 하면서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들도 없고 할아버지도 안 계셨을 것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강당을 가득 메운 회중들은 또 한 번 신선한 전율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부한 자와 가난 한 자, 상전과 종이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은 있었지만 차별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환경과 배경속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였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함께 찬양하였으며 함께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장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당시 교회에도 차별하는 모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로 여겼고 더 나아가 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9절에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인종색과 계층과 성별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여 서로를 향해 존귀함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가 차별 없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 누구도 저희 교회에 소속되어졌을 때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대우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대할 때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기쁨이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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