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 29. 교회를 위한 기도 5/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에베소서 3:14-19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강해 29번째 시간입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로는 5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나누었던 기도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첫 번째가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기도했죠.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네 번째로 오늘 살펴볼 내용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라는 내용입니다. 또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신앙의 나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박았다면 이제 자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의 네 가지 차원,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생활 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뿌리는 내리는 것이죠. 그래야만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을 유지하게 됩니다. 또한 신앙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로 부르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과 깊이 있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축복들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이제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앞의 두 개의 기도내용과 연관됩니다.
두 번째 기도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이고, 세 번째 기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가 박히게 하옵소서입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와의 깊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동행이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 지식이 처음에는 일천하지만 함께 동행하면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들이 우리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왜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까요?
그냥 하나님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도 될 텐데 굳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표현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알려면 당시 에베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입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시 에베소 교회를 진단하시고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2절에 칭찬의 내용을 보면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지만 그것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거짓된 복음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들은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바울의 수고와 권면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입니다.
사나운 이리,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30절). 그들을 분별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두란도 서원에서 하나님 말씀을 쉬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와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에베소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다른 어떤 교회보다 지적으로 탁월했던 것입니다. 에베소 지역 자체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지식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것도 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교리공부와 같은 것들이 중요시 되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휴가 때 설교로 섬겨주신 이**교수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이교수님은 주일에는 주로 초청받아 설교를 하러 다니시는데, 몇 개월 동안 앞구정에 있는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개척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그분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하시던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국의 명문 코넬대학교 출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모여서 교회를 개척하신 것이죠. 그러니 설교자로 아무나 모실 수 없고 지적으로 탁월한 분들만 모시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당연히 설교가 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전하면 금방 분별해 낼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남달랐고 거짓 교사를 금세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말씀공부로 훈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위에 세워지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또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운데 사랑이 식어버린 것입니다. 머리만 커지고 행함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식으로는 탁월하지만 가슴은 냉랭한 성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2장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러분! 지식만 커지고 사랑이 없으면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진실한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에베소 교회는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지만 행함과 진실함의 순종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사랑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가 박힐 뿐만 아니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체험의 사랑으로 알게 하옵소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알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기노스코” 인데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지식이나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체험적, 경험적으로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배추씨와 무씨가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여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농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심어보는 것입니다. 두 개를 심어놓고 자라는 것을 관찰하면서 두 개의 차이를 알아가게 됩니다.
세 개의 지식 중에 어떤 것이 성경적인 알다 즉 “기노스코”에 가까울까요?
물론 세 번째입니다.
심어보고 자라는 것을 보면서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알아가는 지식은 지식을 초월합니다.
인격적 관계에서 안다는 것은 무씨와 배추씨를 심어보고 아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가 알아가는 대상이 인격입니다. 인격은 신비하고 놀랍습니다. 아무리 알아도 그 깊이와 넓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결혼하신 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잘 압니까? 얼마만큼 아십니까? 여러분의 아내를 잘 아십니까? 얼마만큼 아십니까? 나는 남편을 잘 알아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장모님께서 장인어른에게 하신 말씀, 도대체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 대상이 인격이 아닐 때는 알아야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라고 할 때, 돼지에 대해서 일주일만 배우고 농장에서 3년 정도 일하면 어느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은 다릅니다. 함께 살아가고 경험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아마 평상을 함께 살아도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주님은 어떻겠습니까?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고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의 사랑에 뿌리를 박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여정속에서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단지 성경공부를 통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체험되고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체험하고 경험한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강팍하면 그 사랑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강팍한 심령을 뚫고 그 사랑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 사랑이 너무 강력해서 어떤 것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바른 말씀 위에 지식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에 설교를 듣고 또 교리도 배우고, 성경공부도 하고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시골에 계신 성도분들 중에 글도 읽지도 쓰지도 못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구부려진 허리로 복음을 전하시는 어르신들을 떠올려 봅니다.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집으로 불러 밥 한끼 대접하시는 그분들의 따듯한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 사랑 앞에 지적으로 뛰어난 신학박사들도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계획되어지고 진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성경을 많이 아는 성도들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기초로 하여 사랑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모임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도록 기도하는 모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무엇 때문에 중요할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 그분의 자녀가 되어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지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배울 때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의 심장까지 오기 위해서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알아갑니다.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을 알아갑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얼만 만큼 이기적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희생과 포기와 헌신이었음을 알아 갑니다.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면서 주님의 용서하심을 알아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용서를 하면서 용서를 배워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하고 싶은데 용서를 못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와 같은 자를 용서하셨는가 그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식으로 우리 머리에 담겨있습니다. 이것을 실천하면서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단지 막연한 원수가 아닙니다. 막연한 원수는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전쟁을 겪지 않아서 그런지 김일성을 용서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가 저희 아들을 때려서 상처를 입혔다고 하면 쫒아가서 갚아주고 싶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원수, 나와 우리 가족에게 피해를 준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 던지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사랑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용서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희생하면서 희생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방식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주변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인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주님은 형제자매에게 한 것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쁜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삶이 주님의 사랑을 더 깊고 풍성하게 알아가길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 계속해서 사랑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희생이고 포기이고 헌신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사랑의 사람들로 빚어갈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