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실황 전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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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1.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7.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한 것보다 넘치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에베소서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강해 31번째 시간입니다.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로는 7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의 최고수순의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인내, 기쁨, 사랑 등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죠.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해지면 더 이상 우리에게 기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주 이러한 기도로 기도하셨나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내용은 기도의 내용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1.기도와 찬양은 함께 합니다.
본문을 보면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찬양의 대상이 어떠한 분이신가? 20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20절은 그 송축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기도는 자신의 간구를 아뢰는 것으로 한정할지는 모르지만, 성경의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곡조를 붙여 찬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보아도 찬송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어떤 부분일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 이것을 기도의 내용으로 해석하는 분도 계시고 또 찬송의 부분으로 해석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부분도 찬송에 해당합니다.
원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는 찬송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기도를 드리다 보니까 자신의 간구만 간구하고 마치기보다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이 부분을 추가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찬송으로 시작하고 찬송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마땅함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간구만을 아뢰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우리 가운데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또 그 하나님 어떠한 분으신지를 묵상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간구를 아뢰는 이 모든 과정이 기도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의 기도 가운데 적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하다보면 우리의 간구가 10분 이상을 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새벽에 기도하다보면 저와 가족들의 간구가 넘지 못합니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하니까 그나마 1시간 정도 기도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기도라는 것인 누군가의 필요만을 간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시간에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분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시간에 함께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찬송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20절을 보시면 바울이 찬송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것은 그의 삶 속에 체험한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이 체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 또는 이루어주셨으면 하는 나의 생각들,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로부터 “너는 참 복이 많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냥하시는 말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저도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그것은 무언가를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체험될 때는 어떤 물건이 필요한데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경로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한두 번이면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할 텐데 제 삶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도 듣는 말이 “목사님은 참 복이 많으세요.”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느끼시죠?
여기에 모이신 대부분의 분들이 어떤 분들이신 줄 아십니까?
제가 우리교회 꼭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분들입니다. 그건 제 아내가 확인해 줄 것입니다.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난 그분이 우리교회 꼭 오셨으면 좋겠어. 사실 그 당시에는 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런 분들 중에 제가 아내에게 말로 했던 분도 있고 생각에만 머문 분들도 계십니다.
어떻게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이렇게 현실로 이루어지는가?
제가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고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넘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기적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이것은 절대 겸손함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목사가 되었고 이렇게 귀한 분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제 능력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부분 자기 수준에서 최선을 간구합니다.
희수가 커서 뭐될래? 하면 경찰아저씨 또는 공사하는 사람, 또는 사범님이 될 거야. 최근에는 놀이선생님이 될 거야.입니다. 희수 수준에서 최선인 것입니다. 만일 희수에게 100만 원짜리 수표와 스티커 북을 놓고 무엇을 고를래? 하면, 당연히 스티커 북을 고를 것입니다. 그것이 희수에게 최선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내 수준에서 최선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우리가 최선의 것이라고 구한 것을 하나님께서 늘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면 내 삶의 수준은 내 지혜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어떠셨습니까?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다.
여러분이 현재 하나님께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청년들은 능력 있고 신앙도 있고 외모도 괜찮은 멋진 형제 또는 자매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응답받지 못해 하나님이 정말로 능력이 많으신지 체험하지 못하셨나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현재 닥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였지만 응답받지 못하고 계신가요? 그래서 하나님 정말로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능히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생명을 구한 적이 없는데 이 세상에 이렇게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구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태어난 것은 여러분이 구하신 것입니까? 만일 북한 땅이나 아프리카 오지에 태어났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영생이라는 선물은 여러분이 구하신 것 맞습니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구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나요?
그렇지 않죠. 내가 구한 것은 내 수준에서 최선의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수준에 최선의 것들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하시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적극적인 자세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시는 예가 이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 중에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무엇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까? 좋은 것입니다. 이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입니다. 내 편에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편에서 좋은 것이 내 수준에서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현재의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내가 처한 환경이 하나님의 보실 때 가장 좋은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남편 또는 아내가 하나님 보실 때 가장 좋은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하거나 생각한 남편이 아니라구요? 사실 그 이상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까? 아니요. 그 이상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최선을 것을 주셨다라는 믿음 말입니다.
내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의 좋은 것을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평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와 다르거든요. 하나님인 보는 것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잖아요.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고 찬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유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현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로마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그를 찾아오는 황제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심방부에 복음이 심겨지게 된 계기가 바로 바울이 수감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아시아로 가려고 할 때 밤중에 성령께서 나타나 마게도냐로 가라는 환상을 주십니다.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서 첫 번째 만난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그곳에서 기도할 장소를 찾아 가다가 귀신들린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귀신을 내어쫒자 더 이상 점치는 일을 못하게 되자 그 주인이 바울을 거짓 고소하게 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려움이 없고 형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낙심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함께 수감된 실라와 함께 컴컴한 그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곳에 갇혀있던 죄수들이 그 찬송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무겁고 적막한 깊은 어둠을 뚫고 고요한 찬양이 감옥안에 퍼져갑니다. 그러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들을 지진의 충격에 묵고 있던 쇠사슬도 다 풀어져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간수가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수가 도망하면 그 죄책을 간수가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울이 그를 말리죠. 내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있다. 간수가 이 사실 앞에 부들부들 떨며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때 바울이 그 유명한 말을 하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그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온가족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렇게 해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보십시오.
바울이 어떻게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을까?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그의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은혜를 주심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감옥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행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 가족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시작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서 이 글을 쓰면서도 바로 그러한 자신의 삶의 여정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는 은혜를 베푸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아니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은혜가 임할 것임을 확신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 모두 형통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고 계획한 일들이 잘 안풀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돌보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비록 건강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얻은 분들이 계십니다. 사업에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천국의 삶의 사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 아니라 하나님 보실 때 가장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구만을 나열하고 아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까지 오는 동안 살아서 역사하셨던 은혜의 손길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그 하나님을 어떻게 찬송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합니다! 라고 찬송합니다.
3.그 영광이 어디서 영원한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실 교회와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땅의 교회가 비록 불완전하고 연약하고 부족할 지라도 하나님은 교회를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 아닙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분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을 주고 사신 존귀한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능력, 공의, 인자함, 기쁨, 용서 이러한 그 분의 성품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물론 자연만물도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인격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다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직 교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을 설명하게 알 수 있을까요? 공부하면 그 사랑을 알 게 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그 분의 자녀들의 사랑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세상이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의 용서하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그 사랑,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도리어 복을 빌고 기도하는 그 넉넉한 용서와 인내와 사랑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착한 행실이란 그 위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빛과 소금으로 서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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