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실황 전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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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2.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에베소서 4:1-3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강해 32번째 시간입니다.
바울 서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교리와 실천입니다. 앞부분은 대체적으로 교리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그리고 뒷부분은 실천적인 부분에 해당합니다. 에베소서뿐만 아니라, 로마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 대체적으로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다루게 될 내용은 실천적인 부분에 해당합니다.
1-3장까지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에 대한 답변이라면, 4-6장까지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답변입니다.
1-3장까지의 내용 중에 무엇이 기억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할 때 어떤 것이 떠오르십니까?
먼저는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그분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죠. 그렇다면 죄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에베소서 2:8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된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택하시고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3절에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목적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룩함에 이르는 목적으로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기도의 내용을 지난 6주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 드릴 수 있는 위대한 기도였습니다.
이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살 것인가? 할 때 그에 대한 답변을 4장에서부터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부분으로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문에는 ‘칼레오’라고 되어있고 영어성경은 ‘Call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부르다’ 이름 짓다‘ 초대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부르심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리에서 우리의 구원과정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부르심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 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내가 자원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자녀로 이미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가운데 태어나 살게 하시다가 그분의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자원하여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연히 된 것도 또는 우발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의 삶을 목적하시고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 목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에 이르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때 그것을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그분의 손길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을 섭리라고 하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섭리해 가시죠.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개인의 역사 가운데 펼쳐질 때 가장 먼저 체험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부르심입니다.
인생의 향방 없이 살던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셔서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분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 이것을 쉽게 이해시키십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목축방식은 동네마다 양의 공동우리를 설치하여 함께 보호했습니다. 저녁에는 공동우리에 있다가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와서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 풀을 먹이러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양들은 귀가 예민하여 자기 목자들의 음성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이 들리면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상이라는 우리 가운데 살아가다가 어느 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 음성에 끌려 지금 이 자리까지 나온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는가?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거룩한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살전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벧후 1:3-4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이 세상이 부패하고 썩어진 죄악세상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거룩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면 굳지 부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죄악으로 부패하고 썩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으로부터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때 롯을 불러내어 생명을 지키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죄악된 세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불어내어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악으로 썩질 세상에서 불러내신 자들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원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크”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밖으로” 라는 의미이고, “클레오”라는 단어는 부르다는 의미입니다. 죄악 된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자들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비록 세상에는 속해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공동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떠한 목적으로 부르셨는지를 알고 그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악시오스”인데 어울리다 적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부르심에 어울리게 행하라, 부르심에 적합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1-3장에 말한 것처럼, 너희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것에 어울리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것일까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
첫 번째로 겸손함입니다.
2절에 보시면 “모든 겸손과”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신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겸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보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만든 가치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합니다. 출신이 어디인지? 학벌은 어떤지? 직업은 무엇인지? 직위는 무엇인지? 연봉은 얼마인지? 등으로 파악하죠.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누구입니까? 모두 죄인입니다. 허물과 연약함이 많은 죄인이죠.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무엇이 주어져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나 현재의 자리 무언가 내세울 만한 축복의 꺼리들, 그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히 행하는 것 중에 첫 번째로 겸손을 말할 까요?
바울은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교회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부르심이라는 것 자체가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을 부르시지만 그 부르심은 교회 공동체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모였을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겸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2:3>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성도들과의 관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하면 상대방이 나 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럴 때 참된 교제가 가능합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정체성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우리는 진정한 주안에서의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나도 죄인이고 상대방도 죄인입입니다. 나도 연약하고 상대방도 연약합니다. 나도 실수하고 상대방도 나에게 실수할 수 있습니다. 나도 상처를 주고 상대방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억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두 번째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온유입니다.
온유는 온화한 성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유를 가장 잘 설명한 사자성어가 외유내강입니다. 겉은 부드러우나 속마음은 단단한 심성을 말하지요.
“온유”를 성경사전에서 보니까 길들여진 짐승의 유순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마치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어져 유순하듯이, 우리에게 있는 야생적인 성품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완전히 굴복되어 복종하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온유한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내 감정대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억울해도 하고 싶은 말이 목젖까지 차올라도 억누르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고 또 사람에 대하여 상처받고 실망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래 참을 일이 없겠지요. 오래 참을 만큼 어려운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은 것은 어떤 힘든 일일 수도 있겠지만 본문에서는 사람에 대하여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라인홀드리버의 기도문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함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함, 이것이 오래 참음 아니겠습니까?
결혼해서는 별로 오래 참을 일이 없었는데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는 오래 참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오래 참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억제된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게 되어있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바꾸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냥 오래 참아라! 하지 않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오래 참을 수 없거든요.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말로 바뀌지 않습니다. 잔소리 한다고 바뀝니까? 반갑만 생깁니다.
설교 중에도 잔소리 설교가 있습니다. 십일조 하십시오. 성경 읽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잔소리 한다고 그렇게 되던가요? 아닙니다. 용납하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죠.
미성숙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현합니다. 쉽게 분노하거나 쉽게 눈물을 보이죠.
우리는 상대방에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기다려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오래 참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감정대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가 죄를 탐하고 즐겼을 때 이미 심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려 주셨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잡아 오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시죠.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는 것입니다.
결국 강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그 오래 참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감정과 상황에 따라 쉽게 움직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과 또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오래 참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각 사람이 몸의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
몸이 하나인 것처럼 교회는 하나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모으신 것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인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을 통해 한몸을 이룬 것처럼, 성도들은 세례를 통해 한 몸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너와 나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누가 이루었는가? 바로 성령님께서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회가 비전을 세우고 어떤 일에 열심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됨의 관계입니다. 일보다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기만 하면 어떤 어려움도 넘어갑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하나가 될 때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됨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셨지만 세 인격이 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또한 공동체로 있을 때 참 행복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독불장군 식으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아닙니다.
홀로 있으면 편할 수도 있고 갈등을 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회피이고 도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하나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형제 자매가 되어 그 나라의 기쁨과 사랑과 축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필요한 것이 겸손이고 온유이고 오래 참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덕목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성도와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의 사랑스런 자녀들로 부르시고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뜻은,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은혜입니다.
이를 위해 더욱 겸손하시고 온유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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