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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4.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강해 34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하나되게 하심과 하나된 교회가 성장해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가 되어 건강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각자의 은사의 분량에 맞게 섬김으로 교회는 성장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공동체 보다는 각 개인을 염두해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 공동체로 부름받은 각 개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를 보면, ‘이렇게 행하지 말고 이렇게 행하라’는 구조입니다.
17절을 보면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
이방인처럼 행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고, 18절, 19절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24절에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시죠.
그렇다며 이제 본문 구조에 따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렇게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이방인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어떻게 행합니까?
1.
17절에 보니까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허망’은 원어로 ‘마타이오테스’입니다. 공허함, 목적없음, 무가치, 덧없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무가치하고 덧없고 헛된 것들임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전도서입니다.
전도서 1장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자는 이 땅에서 인간이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헛되었으면 다섯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해아래 이 땅에서 사람들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일까요?
그것은 무가치한 것, 공허한 것, 일시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무가치하다는 것은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나름 인간의 모든 수고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살았어, 성실하게 살았어 라는 말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이 있고 반드시 추구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면 허망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며 예수님을 닮아가며 살아갈 때 우리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지 못했다면 허망한 것입니다.
2
다음으로 불신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습니다.
18절에 뒷부분 보시면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이것은 죽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우리 몸이 호흡을 하고 살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면 영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비참한 상태입니다. 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생명이 있습니다. 반면 뿌리가 뽑히면 죽게 되죠.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듯,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생명에 붙어 있을 때 영생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면 멸망이며 죽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8절 앞부분을 보면 ,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에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총명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지 때문이고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총명해지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굳어진 마음이 풀어지고 그 심령이 가난해 지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인간의 결과는 무엇인가?
19절입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을 더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붙어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의 축복들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죠. 반면 그 생명에서 떠나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와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그 속에서 풍요를 누리고안정된 삶을 살려고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과 경쟁하고 착취하고 짓밟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자원들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보지만 그 만족감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결국 방탕과 방임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인간은 허망하기 때문을 그것을 채우려는 몸부림이 방탕과 방임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의 삶을 너무나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정확한 진단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삶의 윤택함을 위해 노력합니다. 열심히 노력해 집도 장만합니다.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이 잡히면 그것에 만족하며 살지 않습니다. 욕심을 냅니다. 땅도 알아보고 아파트도 알아봅니다. 주식이나 뜨는 펀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또는 대박을 꿈꾸며 사업에 도전해 보기도합니다. 만일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결국 그 욕심이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허망하면 자꾸 헛된 꿈을 꾸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 상태에서 수중에 돈이 있게 되면 분별력을 상실하고 헛된 것에 투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하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패하셨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축복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그 욕심이 나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삶까지도 허망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아 거만한 것보다 돈이 없고 겸손 한 게 복입니다. 물론 돈이 있고 겸손하면 더 좋겠지만 말입니다.
허망한 삶은 결국 방탕과 방임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첫 번째로는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21절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다면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목사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목사를 통해 윤리나 도덕이나 철학이나 처세술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가르치는 자들은 이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남겨진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이제는 성경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묵상하며 또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키기 위한 배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자리에 자주 나오시기 바랍니다.
간혹 오랜만에 예전에 함께 신앙생활 했던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전에 비해 더욱 성숙해지시고 겸손해지시고 온화해 지신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분들도 있고, 어떤 분은 이전보다 더 마음이 강퍅하고 교만해진 분도 있어요. 더 이기적이 되었고 비판적이 되었고, 그런 분들 만나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대부분 성장한 분들의 공통점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교우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성장한 경우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말씀에 더욱 부지런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추구했던 허망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행했던 잘못된 생활방식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한번에 버려지지 않습니다. 구습이라는 것은 습관으로 형성된 것을 말합니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죠.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전에 형성된 죄악 된 습관들이 한번에 버려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훈련을 통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게 되죠. 회개라는 것은 ‘메타노이아’인데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추구했던 것들로부터 그것을 얻기 위해 행했던 삶의 방식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세례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이때 무리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대답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옛사람은 우리의 삶은 내가 노력해서 모은 것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많이 모아야 하죠. 그러나 회개에 합당한 삶은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기 위해 공부하고 나누기 위해 돈을 모읍니다.
세리도 질문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당시 세리들은 부과된 것 이상으로 거두어 로마에 상납하면서 자신들도 한몫 챙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시 되던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라 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화적으로 관습적으로 허용된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질문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사람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은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공권력을 사용하여 약자들을 착취했던 삶의 방식에서 돌이키고 받는 급료를 족하게 여기고 그것만으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힘이나 자리를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변에 힘 있는 사람의 빽이나 줄을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점진적 성화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악된 구습과 싸워 나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나갑니다.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구습들이 있습니까? 그것과 매일 싸워 나가십니까?
자 그렇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23절과 24절입니다.
첫 번째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마음이라는 단어와 교차적으로 사용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먼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항상 변화는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마음의 변화가 언어를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마침내 습관을 바꿀 때 삶이 바뀝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 행동만을 바꾸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까지 습관을 아무리 연습하고 훈련해도 성공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의 변화, 마음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내 인격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그분을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에 계시게 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주인의 변화가 심령의 변화입니다. 인격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될 때 마음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이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내가 날마다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싸움 말입니다.
그리고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은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무엇인가? 새번역 성경으로 잃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반사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로움과 거룩함이었습니다.
이것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목욕을 한 후 더러운 옷을 입지 않죠. 깨끗한 옷을 입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면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로움과 거룩함의 옷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깨끗한 것들을 입어야 합니다.
거짓과 불의를 버리고 의로움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가치판단과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의로움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삶에 큰 유익과 윤택함을 주는 그 어떤 것이라고 그것이 불의라면 버려야 합니다. 거짓을 통해 얻는 것이라며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의로움을 선택하십시오.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말고 거룩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한 삶의 방식이며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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