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실황 전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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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자
에베소서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우리는 계속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말, 언어습관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생각의 영역에서 싸워야 할 부분입니다.
죄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말로 그리고 말에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행동으로 표현될 때 파괴력이 강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는 항상 생각의 영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분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끔찍한 범죄의 시작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생활에서 자주 범하는 죄들 가운데 대부분이 분노로부터 출발합니다.
살인, 폭행, 폭언 아니라,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일중독도 분노가 그 원인이 경우가 많습니다. 성형중독이나 드라마를 밤새서 보는 것도 분노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바깥으로 표출되는 분노뿐만 아니라 분노가 우리 안으로 향할 때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심각한 경우에는 자해를 하거나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쉽게 분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의 치열한 경쟁의 구도 속에서 늘 긴장해야 하고 만성적으로 피로한 상태에서 쉽게 분노가 표출되는 것이죠. 운전하다 조금만 실수해도 보복운전을 당하기도 하고, 누군가 내 차선을 침범하기라도 하면 울분이 치솟고 욕을 내뱉기도 하는 것입니다. 조그만 접촉사고만 나도 싸울 듯이 차에서 내려 삿대질을 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여러분! 분노는 습관이고 전염이 된다는 것 아십니까?
분노를 자주 표현하면 이것이 습관이 되고 점차 과격한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처음에는 조근 조근 애기하다가 점차 목소리가 커지다 폭언을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부수고 하다가 나중에는 폭행으로 이어지죠. 이러한 습관이 형성되면 별것 아닌 것에도 자주 화를 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분노는 전염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면 상대가 분노하게 되죠. 그러면 상대방이 받은 분노는 또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전염성은 항상 약자들을 향하기 때문에 직장의 경우 순하고 착한 사람이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분노의 배수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분노는 나를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하여 삶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분노를 참아야 하는가?
분노를 참는 것도 문제입니다. 억압된 분노는 신체화 되어서 호흡곤란이나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심한 경우 암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분노를 참아서 걸리는 가장 대표적인 질병이 화병 아닙니까? 화병은 여성들이 주로 걸리죠. 상대적으로 분을 삼키기 때문이죠. 반면 남성의 경우는 분노조절장애가 많습니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분노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죄가 되고 또 억압하면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텐데 (억압된 분노가 더 무섭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분노라는 정서가 무엇이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노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외부에서 공격을 받을 때 사람이 반응하는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누군가 나 또는 가족에게 공격을 가할 때 분노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는 외부의 공격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시면
“분을 내어도”라고 말합니다. 분이 나는 감정자체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 분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십니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성경에는 하나님도 분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분노하십니다.
예수님도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고 분노하십니다. 상을 엎으시고 채찍을 만들어 가축을 내어 쫒으십니다.
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 가셔서 분노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우는 자들과 그의 가족들의 아픔을 보실 때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11:33). 이 부분의 원문을 보면 “엠브리마오마이”입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분노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의 죽음 앞에 울고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의 고통이 가져다준 사랑하는 자들의 고통 앞에서 죄와 사단을 향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노하셨다면 분노의 감정 자체를 죄악시해서는 안됩니다.
분노가 왜 일어났고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의 분노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공격당할 때 분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여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리는 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할 때는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공격당할 때 분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분노하셨으니까 우리도 분노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노의 감정은 인정하지만 죄 짓는 방식으로 표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분노를 잘 다스리고 처리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첫 번째 화가 났을 때 내가 화나는 이유가 정당한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어도 화가 낼만 한 상황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분노는 과거의 상처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 상황에서 속상한 정도로 끝나는데 나만 유독 화가 치밀어 오른다면, 그 분노의 근원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분노하지만 사실 그 원인은 어릴 적 상처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유독 큰 일이 아닌데도 화를 많이 낸다면 내 분노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은 참고 잘 다니는데 유독 나만 상사에 대하여 또는 하급자에 대하여 자주 화가 치밀어 오른다면 그 분노의 원인이 근원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가운데 있으면서 어떻게 목사가 저럴 수 있어? 어떻게 믿는 사람이 저럴 수 있어? 하며 분노가 지나치게 내 마음을 흔들어서 일상생활에 까지 영향을 준다면 그 분노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까지 화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을 방해할 만큼 또는 그렇게 까지 화가 나지 않기 때문이죠.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상황이나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과거에 받은 상처, 불안, 두려움, 따돌림, 억압 등,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동일하거나 비슷한 상황을 대하게 되면 분노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삶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녀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는 자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면서 자매가 어릴 적 부모로부터 충분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주 큰 소리를 내고 싸우는 부모님 밑에서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 살았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자신의 아이는 충분한 돌봄과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자주 짜증을 내는 것을 보면 분노가 자주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은 어릴 적 이러한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자신의 아이는 이렇게 충분한 조건에도 짜증을 내는 것이 화가 난 것입니다.
자매의 분노의 원인은 자신의 아이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릴 적 그 두려움에 떨던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부모에 대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분노의 근원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이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분노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분노는 풀어야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을 아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힘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화가 났었는지, 그때 누군가 나를 돌봐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만 이해해도 많은 부분에서 분노가 풀립니다.
두 번째는 내 몸과 마음이 지쳐있지 않은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영적 생활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 또한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습관뿐만 아니라 운동하는 습관 그리고 자신의 마음의 평안함을 위해 조용하고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영혼과 육신과 마음 이 세 가지 영역에 있어서 동일하게 건강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병들면 영혼과 마음도 영향을 받습니다. 마음이 다치면 영혼과 육신도 지치고 피곤합니다.
어느 한 부분이 지친 상태에서 외부의 자극이 들어오면 분노가 쉽게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면 피곤한 육신과 상처 난 마음을 어느 정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기 있는 컵과 같습니다. 컵에 물이 차면 조그만 자극에도 물이 넘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차 있으면 작은 자극에도 쉽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최근 자주 쉽게 화를 낸다면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마음에 쌓인 것들을 비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행을 다녀와도 좋고, 자연 속에서 걷는 것도 좋습니다.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잠시라도 그 상황에서 분리된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희생과 헌신도 내가 건강해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지친 영혼과 몸과 마음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사단이 역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역사할 틈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죠. 억압된 분노는 또 다른 형태로 공격성을 가지고 나타날 것입니다. 분노를 품으면 마귀가 역사할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요?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방법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내 마음속 감정을 적당한 단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자꾸 연습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 때문에 내가 너무 속상해,”
감정을 담는 많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두려워, 답답해, 미치겠어. 열 불나, 다 때려 부수고 싶어(부수는 것 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낳습니다),
분노를 표현할 때 한 가지 주제, 현재의 문제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간혹 30년 전 화가 난 일부터 끄집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됩니다. 현재 내가 화가 난 그 일에 대하여만 다루어야 합니다. 말할 때는 요점만 명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내가 이것 때문에 화가 났다고 명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해야 합니다. 변명하지 말고 논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감정적 표현은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감정이 상하면 무슨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토를 달거나 말꼬리 잡고 논쟁하려 하면 안 됩니다. 감정의 언어에 대하여는 일단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할 때는,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고 표현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감정을 자제하고 유순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단이 아니라 이해의 눈빛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어” “사람이 다 그렇지 뭐”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분노가 사라집니다.
자주 화를 내는 분들을 보면,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과거의 상처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그런 분을 대할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1:19-20>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잠 12:16>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 분노를 바로 표현하는 것은 상처를 남깁니다.
화가 나면 30초, 그것도 힘들면 3초라도 참아야 합니다. 타임아웃 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잠시 벗어나서 물 한잔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분노 때문에 힘드신 분들은 금식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3일 정도 금식하면 화낼 기운이 없어집니다. 배가 고프니 별것 아닌 것에는 반응하지 않게 되거든요.
마지막으로 요셉의 모습을 통해 분노를 건강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죠.
그곳에서 보디발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얼마나 분노할 상황입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고 그토록 보고 싶던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제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때 요셉에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창세기50장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자신이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어려움을 겪었음을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았고 어렵고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처 입은 삶 속에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형들에게 원망하고 분노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아픔의 과정 속에서 선한 일들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그 상황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픔을 주었고 두렵게 했던 그 상황을 분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성숙되었으며 삶에 대한 유연함과 긴호흡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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