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 3. 은혜와 평강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의 서신 서들을 보면 일관되게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습관적인 인사말이기 보다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을 얻게 된 이후에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것을 인사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바울의 신앙 고백 가운데 가장 핵심입니다. 또한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이기도 합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오늘은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은혜의 결과인 평강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은혜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지난 시간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즉 성도가 되는가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하시면서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대하신다고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하시죠. 강압하거나 강제하지 않으시죠. 인격적 관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강압하거나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폭력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맺어진 관계가 건강할 수도 없고 그 속에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를 향해 신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인지라 신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실함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는 신실하지 못한 우리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지속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이 땅에 살아가가다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전 과정 속에서 펼쳐지는 그분의 호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든 삶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로마서 8:30>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우리 구원의 전 과정을 말합니다. 구원의 서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미리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완벽한 때에 그들을 부르시죠.
부르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시고 의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러한 구원의 전 과정 가운데 작동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그것이 은혜입니다.
첫 번째 은혜로 구원 얻을 자를 정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 누구도 항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자들이 그럴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특한 모습이 있는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셨습니까?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잡아다 고문하는 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보시면 알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은혜인 것입니다.
<엡2:3-5>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로 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두 번째, 그렇게 구원하기로 정하신 자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부르십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콜링입니다.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장 완벽한 때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모든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셔서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함을 깨닫게 하셔습니다. 내 자신의 누추함과 죄인 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절망했고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세상과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찾게 되죠.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가운데 개입하셔서 그 모든 조건을 만드시고 하나님을 찾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과정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나에게 닥쳤던 삶의 시련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고 삶의 기반이 흔들렸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로 인해 아픈 마음을 간직한 채 소리 없는 통곡의 눈물을 흘린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내 자신에게 절망한 순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겸손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다 얻은 것이죠. 그러한 삶의 절망과 위기 앞에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은혜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삶은 지나온 삶의 모든 순간이 은혜였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순간이 은혜일 것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세 번째 이렇게 부르신 자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딛 3: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의인입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죄를 범하고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의롭게 되었는가?
로마서 3:24절에는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합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당시 시장용어였습니다. 어떨 때 사용했는가 하면, 노예를 돈주고 사서 자유자로 해방시킬 때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돈을 빌렸는데 못 갚게 되면 노예 신분으로 전락합니다. 이때 친족이나 누군가가 그를 돈을 주고 사서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줄 때 사용한 용어가 속량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는 심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판을 십자가에게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인으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죗값이 완전히 치러졌음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마지막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는 말이 “테텔레스타이”인데 이것은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선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의로워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의 기준에 도달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눈에는 누가 더 착하고 의롭고 깨끗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눈에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완전함의 기준에 도달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을 완전히 다 지키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얻게 된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획득하신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된 것입니다.
네 번째 이렇게 의롭게 된 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잠깐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너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가 영화로워 지는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6절을 보시며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실 때 우리도 함께 그곳에 들어가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앉을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미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표현이 가능한가?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 우리가 창세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사고의 시점이 창세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영광의 나라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공간 속에서 사고하지만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보십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을 처음 배웠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작가가 작품속의 인물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그의 태생, 삶의 과정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죠. 그 관점으로 작품을 쓸 때 그것이 전지적 작가시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공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처음과 끝을 아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부르셨다면 그 결말은 무엇입니까? 영화로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계획을 하고 능력이 없거나 환경이 바뀌어 취소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분께서 생각만 하셔도 그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시면 빛이 창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전 과정, 구원으로 이끄시는 전 과정이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실패할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짐하고 결단하지만, 또 넘어지고 또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더러움과 참혹한 죄악이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노력과 의지로 여기까지 왔다면 은근히 자랑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나를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것을 은혜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놈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가? 은혜입니다.
저는 압니다. 지금 당장 지옥에 떨어져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놈입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 있으니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삶이 은혜였고 앞으로의 삶도 은혜일 것입니다.
더 풍성한 은혜가 2019년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 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소망이 없고 낙심되고 절망되지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분께서 붙잡고 가십니다. 그러기에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기대 이상이셨습니다.
이러한 은혜의 결과가 바로 평강입니다.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평화”로 바꾸셔도 좋습니다.
평강은 내적인 평온의 상태를 말하지만 평화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수평적으로 사람들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막힌 담이 허물어져 이제는 평화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엡2:13-17>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인 우리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십자가로 자신의 진노를 달래시고 순종한 그리스도를 안에서 우리를 끌어 앉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있게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 1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을 모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없었다면 늘 염려와 불안함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자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알게 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동물적 삶의 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웃을 착취하여 나의 삶의 확장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치열한 경쟁속에서 지쳐만 갔고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자 이웃은 섬김과 사랑의 대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속에서도 넉넉한 웃음과 여유로운 표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과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한해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기대함과 소망으로 시작하시는 성도님들 되기길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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