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실황 전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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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40.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8-14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강해 40번째 시간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전하겠습니다.
주제사라마구가 쓴 “눈먼자들의 도시”라는 책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데는 인간의 숨겨진 죄성을 드러낸데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평범한 어느 날 오후, 차를 운전하던 한 남자가 차도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다른 남자의 안내를 받아서 집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그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그를 간호한 아내도, 남자가 치료받기 위해 들른 병원의 환자들도, 그를 치료한 안과 의사도 모두 눈이 멀어버립니다.
정부는 백색실명 현상을 전염병으로 여기고 눈먼 자들을 빈 정신병동에 격리수용하기에 이릅니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병동에서 오직 그녀만이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합니다.
과연 눈먼 자들이 모인 수용소 안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온갖 난잡한 죄의 잔상들이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그들 중에는 지식인도 있고 정치인도 있고 종교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둠속에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잠재된 있던 자신안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어둠의 세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작품속의 세상은 단지 가상의 세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터넷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터넷은 익명성이 보장됩니다.
서로를 볼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온갖 난잡한 죄의 일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인터넷 댓글로 사람을 죽입니다. 음란과 거짓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어둠은 숨겨진 인간의 내면의 죄악된 행위를 숨겨줍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죄는 대부분 어둠 가운데서 행합니다. 더럽고 추잡한 행위는 대부분 어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밤 문화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범죄가 난무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전에는 어둠이더니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기 전 우리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의 존재가 어둠과 같았다가 아니라 어둠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어둠속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둠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어둠은 자신의 어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만큼 부끄러운 모습이었는지, 나의 상태가 얼마만큼 죄로 인해 타락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빛이 비추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둠은 모든 죄와 더러움을 은폐해 버립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요한일서 1:5>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빛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둠가운데 있는 세상에 오시자 어둠이 자신의 어둠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빛이 오기 전까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빛이 비추자 어둠의 일들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임하실 때 첫 번째 현상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나의 죄의 더러움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다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과거에 지었던 수많은 죄들이 얼마만큼 더럽고 추악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시편 32편에서 다윗은 어둠가운데 있던 자신에게 주님께서 빛으로 찾아오실 때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32편>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주님은 죄악가운데 있는 우리가운에 찾아오셔서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십니다.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자신을 누른다고 말합니다. 얼마만큼 그 압박이 심하였으면,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말에 골수가 다 말라다는 표현입니다. 감추어진 죄를 폭로해 내어 마침내 회개하고 자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5절에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2. 이제는 빛이라
이렇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빛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7절 “이제는 빛이라”
우리는 어둠이지만 주님의 빛을 받아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광체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태양과 같이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는 달처럼 반사체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어둠이지만 하나님의 빛이 비취어 빛이 된 것입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정체성에 걸맞는 행함
1.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구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부모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빛의 속성을 가지기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빛의 속성,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빛의 속성을 이제는 우리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둠가운데 빛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2.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지신 빛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것을 빛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는 성도들의 행함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2-1) 착함(goodness)
착함이란 선함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goodness.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모든 것을 보시며 감탄하셨던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따라서 착함이란 더럽고 추악했던 어둠이 사라지고 창조 때의 선함의 모습이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죠. 그러나 빛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이미 회복된 것입니다.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착함, 선함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보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존재들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그것을 추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착함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착함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행하십시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연 악함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사기에서 정확하게 보여주죠. 사사기를 우리가 전에 살펴보았는데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충격적인 죄의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가나안의 온갖 우상을 섬기고, 순결해야 할 레위인이 첩을 얻어 살고, 그 첩이 집단으로 강간을 당하고, 레위인을 그 첩을 12토막으로 자르고... 여러분!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러한 악함의 시대를 보고하면서 성경은 그 원인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하는 것이 악행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함에 있어서 가장 첫 번째 기준은 이것인 착함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인가? 선한 것인가? 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에게 유익이 되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나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면 행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2-2)두 번째 기준은 의로움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과연 의로운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계획하고 진행하는 일이 의로운가?
‘의롭다’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공평한 것입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의 생존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할 수 있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여러 가지 구할 것이 많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나의 유익과 필요를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정직한 것, 정의로운 것, 공평한 것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빛의 열매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마땅히 보여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탁월한 신앙인들만, 영적 리더들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라면 마땅히 이렇게 행해야 합니다.
2_3)세 번째 기준은 진실함입니다.
학자들은 진실함이란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성도들의 행함의 기준은 진실해야 합니다.
어원적 의미를(알레데이아)를 보면 ‘사실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때는 진실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이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모습 그대로 살 때 가장 안정되고 편안합니다.
또한 진실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진실함은 변하지 않는 것, 확고한 것, 확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사야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베드로전서 1:25>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야 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늘 묵상하시는 분들은 진실해질 것입니다.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있죠. 대표적으로 돈과 명예와 쾌락 아닙니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변하는 것들이죠. 이것들을 추구하게 되면 진실함이 사라집니다.
돈을 추구하면서 진실해지기는 어렵습니다. 명예를 추구하면서 진실해지기 어렵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면서 진실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자들을 진실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세미나에서 들은 말씀입니다. 보통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경직되고 쉽습니다. 특히 탁월했던 학자들은 그러기 쉽지요. 돈 카슨 교수가 존경했던 교수님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겸손하고 신실하셔서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질문을 드렸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학자로서 교수로서 이 나이에 이르러도 여전히 겸손하십니까?
그 목사님 대답이 이것입니다. “내가 항상 십자가 옆에 서 있는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씀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진실해 집니다. 우리가 거짓을 추구하다가고 말씀이 우리의 어둠을 깨닫게 하여 다시금 진실함으로 돌이키게 합니다. 주의 손이 나를 짓눌러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2_4)네 번째 기준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10절에 보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서 “시험 하여보라”는 것은 “드러내다” “입증하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과학자가 어떤 이론을 확증하기 전에 여러 번의 실험 또는 시험, 즉 Test를 거치지 않습니까? 이 시험을 통하여 자신의 이론을 드러내고 입증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행함으로 너희가 빛의 자녀임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진행하는 모든 일들을 결정하기에 앞서 이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인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인가? 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까? 를 분별해야 합니다.
청년들은 이성교제를 할 때 또는 교제할 대상을 선택할 때 이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 사람과의 만남을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직장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수험생들은 진로를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죠. 이 학교를 이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전에 부목사로 사역할 때 저희 교구에 한 구역장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청심국제고등학교에 보낸 것입니다. 이곳에 통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입니다. 다른 국제학교도 많은데 굳이 이곳에 보낼 이유가 있었을까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빛의 열매를 나타낼 때 어떠한 결과가 일어나는가?
세상의 어둠이 폭로되어 그들도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됩니다.
<엡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우리가 세상의 어둠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빛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자신의 어둠을 인식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빛으로 행하면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발각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세상은 돈과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기에 착함이나 의로움이나 진실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올라가 그 일을 추진합니다. 그때 누군가 이 일은 아무리 많은 수익을 내지만 진실하지 않다고 거짓이라고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반대한다면, 그 가운데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그때 어둠가운데 있던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어둠을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두 번째는 그 빛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빛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빛이 비추자 자신의 어둠을 폭로당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자신의 위선적 신앙이 폭로되자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10-12>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말씀 이후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이후 우리가 계획하고 진행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이 기준을 적용하십시오.
그럴 때 그 빛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빛을 보게 할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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