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실황 전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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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식으로 일하라
에베소서 6:5-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에베소서 강해 44번째 시간으로 그리스도인의 일과 소명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에베소서는 이제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신실한 신앙은 현실의 삶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속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가 경건한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부딪히는 일상의 삶속에서 성도의 본분을 다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당시의 종과 상전의 관계, 오늘날로 하면 직장에서 사장과 직원의 관계 또는 상사와 하급자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보여 할 삶의 중요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과연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 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신실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인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일을 하십니까?
당장 나올 수 있는 대답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일에 대한 개념을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업으로서의 일입니다. 영어로는 Job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명예나 출세를 위한 목적으로서의 일입니다. 영어로는 carrier입니다. 자신의 커리어 때문에 또는 커리어를 쌓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일을 하는 이유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 또는 경력을 쌓아서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수단으로서의 일입니다.
수단으로서의 일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들어 결국 불행으로 이끕니다.
세 번째는 소명으로서의 일입니다. 영어로는 calling입니다.
일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단으로서의 일이 아닙니다. 일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 즉 목적이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소명이라고 하면 목사나 선교사에 한정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소명 받으신 분 손들라고 하면 대부분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의 성경적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1-3절을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여기 보면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1절에서 “사도로 부르심”이 등장하고 2절에는 “성도가 부르심”이 언급됩니다. 성도로 부르심은 새로운 신분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1차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다음으로 사도로 부르심은 직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2차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소명을 받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2차 소명입니다. 과연 목사와 선교사만 2차 소명을 받은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중요한 결론중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만인제사장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교황이나 사제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소명을 받아 구별된 삶을 살았다고 믿었습니다. 성당이나 예배의식 그리고 이것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거룩하지만 세속의 일은 속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특별히 칼뱅은 모든 성도가 거룩한 제사장들이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 그것이 세속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소명의식입니다. 교황이나 사제들만이 소명을 받아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는 소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생업조차도 거룩한 일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면 목사는 목사의 직분으로서 2차 소명을 받은 것이고, 여러분들은 자신의 직업으로서 2차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 일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그냥 가정주부인데요. 제가 하는 일은 아이들 돌보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밥하는 일 외에는 없어요.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의 일인가요?”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설거지와 하나님 말씀 전파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성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직자입니다.
내가 부름 받은 자리에서 소명으로 일할 때 그것이 성직입니다.
아무리 목사나 선교의 일이라 할지라도 Job이나 커리어가 될 수 있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성직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그 일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그 일에 성실함과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23>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죄를 짓는 일이 아닌 이상, 하나님께서 그 자리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으로서 지금의 자리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현재 일이 내 맘에 들던 그렇지 않던 간에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소명을 설명할 때 자신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곳에 소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 또 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 있고 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생업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많은 청년들이 그런 고민을 합니다. 청년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까?
아이: “엄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살아갈 거야”.
엄마: “하고 싶은 일이 뭔데?”
아이: “컴퓨터 게임. 크리에이터, 춤추는 것.”
문제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도 다 하고 싶어 한다는데 있습니다. 만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내 직업이 되려면 그 모든 사람보다 특출해야 합니다. 그만큼 특출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소수의 사람만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당장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카드 빛과 대출금이 쌓여있고 설거지와 빨래는 쌓여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는 것은 어쩌면 여유 있는 자들의 사치입니다.
우리는 당장 먹고 살이 위해 생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먹고 살기 힘들면 그런 말 나오지 않습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 하는데.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핑계로 충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의 그 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누군가에는 아주 사치스러운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명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없듯이 내 맘에 꼭 드는 일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생각과 자세로 하는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을 -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던 또는 해야 만하는 일이던 간에 - 이 일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나를 부르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사업체를 운영 하시는 분, 가계를 하시는 분, 직장에 다니시는 분, 의사 또는 교사 그리고 전업주부 등, 다양한 직종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이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살기 위한 JOB이 아니라, 또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커리어가 아니라 이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충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은 종업원에게 월급을 주면서 여러 가정을 먹여 살립니다. 그들은 한 가정의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그 돈으로 미래의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월급 주는 것 아까워하시면 안 됩니다. 세금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안정된 나라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어머니들이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따듯한 밥 정성스럽게 하면서 가족들은 건강과 정서적 안정과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을 꾸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만일 어머니들이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니야 하면서 집을 나가버리시면 이 일은 누가 감당합니까?
어떤 어머니들은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들 돌보느라 내가 원하는 삶 살지 못했다며 피해의식 속에서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내의 직분 엄마의 직분의 고결함을 알고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피해의식을 심어주고 자기연민에 빠지게 합니다. 엄마로 사는 것 아내로 사는 것 며느리로 사는 것 힘들죠.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 아닙니까? 오히려 그것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자매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자신을 내어주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보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 원하는 삶을 추구하면 당장은 행복할 수 있겠죠. 또 성취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신은 행복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누리는 행복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하고 포기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누리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도 아니고 그리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현재 내가 하는 일,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믿고 그 일에 충실한 것이 성경이 말하는 소명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그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종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사관계 속에서 노동자에 해당합니다.
5절을 보시면 첫 번째로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고용주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용주가 내 맘에 들던 들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사장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노사관계를 투쟁하는 대립관계로 보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사업주는 사업주로서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각자 부름의 자리가 그 자리인 것입니다. 사업주는 사업주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각자의 입장에서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동자라면 사업주에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이 죄를 짓는 일이 아닌 이상 사장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부목사로 사역할 때 담임목사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로의 성공은 부목사 때 이미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전도사 때 이미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사 때 충성하고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부목사가 되어도 그렇게 하고 담임목사가 되어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참 옳은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일에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장사에 성공한 분들을 보면 대부분 종업원으로 있을 때 성실하게 일했던 분들입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고용주에게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장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성실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7절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6절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우리는 사장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주님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장이 볼 때는 열심하고 없으면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든 안보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일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7절에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기쁘게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일하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개신교인들을 일컫는 말이 위그노입니다. 그들은 가톨릭의 핍박을 피해 영국과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만인 제사장론을 발견하였고 또한 소명의식에 대한 각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스위스로 갔을 때 최고의 명품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으로 가서는 비단과 기계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현재 유럽사회가 누리는 부와 복지는 위그노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들이 당시 유럽사회를 복지사회로 발전된 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일을 해서 아닙니다. 각자가 주어진 자리에서 소명감을 가지고 일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을 때부터 성실했습니다. 많은 노예가 있었겠지만 요셉이 특별히 눈에 뜨인 것은 누가 보던 보지 않던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런 노예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억지로 끌려 그 자리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충성했습니다.
<창세기 39:4-5>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의 충실함을 본 주인이 그에게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합니다. 여러분, 사장처럼 일하면 사장이 됩니다. 또한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가정이 축복을 받습니다. 저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사장님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결국 그 축복은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결국 이러한 요셉의 자세가 애굽이라는 대제국을 총괄하는 총리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노예로 있을 때 결정되는 것입니다. 종업원으로 있을 때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내 사업을 하면 잘할 것 같으나 아닙니다. 종업원으로 사원으로 아르바이트로 있을 때 내 미래가 결정됩니다.
성경에서 게으름을 죄로 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성실하지 못한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름은 악한 것입니다.
잘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부도 타고나야 잘합니다. 그런데 성실함은 타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결국 성실한 자들을 승리하게 하십니다. 못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성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만일 내가 노동자라면, 종업원이라면, 직원이라면, 아르바이트생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시길 바랍니다. 사장님이 보던 보지 않던 성실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십시오. 결국 성실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다음으로 상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사업주, 고용주, 사장을 말합니다.
9절입니다. “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사업주라 할지라도 종들에게 주어진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했던 말씀이 사업주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합니다.
“위협을 그치라” 노동자들을 위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노동자들을 을의 위치에 있습니다. 갑의 말과 행동이 위협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일하면 당신 여기서 오래 일 못해” 위협입니다.
“이러면 봉급에서 깎을 겁니다.” 위협입니다.
그것 보다는 일 못하는 사원이 있다면 “김대리, 일하는 것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라고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이것도 위협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일머리를 도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적과 책망보다 칭찬과 격려가 사람을 발전시킵니다.
사장에게 사원들을 다 부족해 보입니다. 고용주에게 노동자는 다 부족해 보입니다.
좀 더 자기 일처럼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갑의 입장보다는 동역자요 협력자로 대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9절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사장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진짜 사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는 다 종업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교회 담임목사라 할지라도 부목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담임목사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창업한 회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사장으로 그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장님들도 종업원을 협력자요 동역자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역의식으로 종업원들을 대하면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그 사업이 살아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를 통한 것이던, 급여를 통한 것이든, 종업원을 인격적이고 성심으로 대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업을 축복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소명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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