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10/ 교회의 하나됨의 자세와 실천/ 2014. 5.31
빌립보서 2:1-4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이러한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요?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곳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죠? 저마다의 교회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데 옆에 몇 분의 아주머니들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분이 자신의 교회를 자랑하면서 우리교회에 나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교회자랑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교회는 좋다. 왜냐하면 예배당 시설이 최첨단이다. 대형 스크린과 최고의 음향시설을 갖추고 있다. 둘째, 우리교회는 좋다. 왜냐하면 주자창시설이 편리하게 되어있어서 언제 와도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셋째, 우리교회는 찬양이 좋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찬양팀과 성가대는 우리동네에서 최고이다.”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 이러한 편리함은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성도는 신앙이 깊어지면 자연히 본질을 추구합니다. 형식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을 담는 그릇이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본질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구조화 됩니다. 그런데 본질은 희미한데 형식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본질이 희박하므로 생명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교회가 속한 교단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 합니다. 왜 ‘개혁주의’라고 부르는가 하면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개혁되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각자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교회가 무엇인가? 또 어떤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인가? 하는 모든 기준은 각자의 교회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관에 그 근거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과제는 그 본질에 합당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표어를 가슴에 새겨, 우리교회에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통해서 계속 배우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비록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빌3:20). 하나님 나라에 속한 우리가 잠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흐름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이며 또한 거기에 살아가는 성도들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죄악된 세상과 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두 개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두 개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로마서 7:21-24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밖으로는 세상의 죄와 안으로는 내 안의 죄악된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나가는 존재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로 연결시켜 한 몸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둠의 세상에 대하여는 복음의 능력으로 대적하고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세상가운데 성취되도록 하는 전투적 사명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의 전투적 사명을 잘 감당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됨’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 바로 교회의 하나됨 이었습니다.
하나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요한복음 17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11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1절-23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됨을 기도하시는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하나됨으로 누리셨던 기쁨을 우리에게도 충만히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3절을 볼까요?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23절입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셋째는 교회는 하나됨으로 하나님의 큰 권능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사도행전 4:32-33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교회는 이러한 하나됨 속에서 성삼위 하나님이 누리셨던 충만한 기쁨과 사랑 그리고 큰 권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단의 주요한 공격의 목표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하나됨의 동기 4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1)그리스도안의 권면 (2)사랑의 위로 (3)성령의 교제 (4)긍휼과 자비입니다. 이것이 교회안에 이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4가지 하나됨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1)마음을 같이 하는 것 (2)같은 사랑 (3)뜻을 합하는 것 (4)한 마음입니다.
4가지이지만 사실 하나의 의미입니다. 하나됨을 강조하기 위한 어법입니다. 첫 번째도 하나요, 두 번째도 하나요 세 번째도 하나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네 번째가 거의 동일한 의미이고 세 번째도 그렇습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도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마음을 같이하여 한 뜻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것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됨의 자세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하는 것’의 의미는 같은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마음’ 보다는 ‘생각’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에 대해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라고 하면 주로 가슴이나 심장을 생각합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마음’하면 주로 머리나 이성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프로네오’는 지정의의 활동을 다 포함하는 개념인데, 그 중에서도 ‘생각’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따라서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같은 것을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같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각자 살아온 환경과 배경에 의해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에 대한 생각은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생각이 같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임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생각할 때 나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계속해서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 가야만 합니다.
하나됨에 있어서 나의 생각을 버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경험과 지혜의 한계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틀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중에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변합니다. 하루에도 열 두번 변합니다. 날씨에 좌우되고, 감정에 얽매이고, 경험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을 계속해서 주장하게 되면 갈등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 생각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각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주장하여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됩니다.
뉴질랜드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처음 세가정이 모였습니다. 저의 가정, 선교사님 가정, 그리고 전도사님 가정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선교사님, 전도사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 모여 회의를 진행합니다. 사역을 의논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참 힘들 때가 많았는데 대부분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을 때입니다. 비록 세 가정이었지만 생각과 뜻이 같아져 어떤 일이 진행될 때는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이 다를 때는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시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 이상 어떤 일을 진행할 때는 반드시 리더가 필요합니다. 혼자 어떤 일을 한다면 자기 생각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머리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교회의 치리권에 대하여 말하면서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교회의 가장 최소단위가 두 세 사람인데 그들이 모이면 예수님께서 머리로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모든 판단하고 계획하고 진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중심의 신앙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목사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오직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성경의 말씀과 일치시키는 것이 하나됨의 가장 중요한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말씀중심’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들 보다는 말씀중심의 예배와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말씀중심으로 모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목사인 제가 먼저 말씀으로 충만해 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이 바르게 증거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제가 나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것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을 조합하여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제 생각일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살리거나 세울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바르게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처음부터 강해설교로 시작을 했습니다. 짧은 목회 경험속에서 때로는 제가 어떤 상황속에서 어떤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말씀을 근거로 전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강해설교입니다. 이미 주어진 성경본문을 우리가 따라 가는 것입니다. 물론 특정한 상황에 맞는 설교가 필요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급적 주어진 본문을 따라가면서 저희 생각을 말씀의 생각으로 고쳐나가고, 그리고 함께 나누면서 우리의 생각을 성경의 말씀으로 정돈할 때 비로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을 버리라
이렇게 우리가 말씀중심으로 생각을 일치시키면 하나될 수 있는 자세가 준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됨을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두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두 가지 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1)다툼 (2)허영입니다.
다툼은 이기심에서 나오는 다툼, 분쟁을 의미합니다. 허영은 헛된 영광을 말합니다. 곧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일을 하다보면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각자의 의견을 성경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들은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게 됩니다. 문제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함에 있어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을 때입니다. 그리고 결국 다툼까지 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투게 될까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 모였는데 무엇 때문에 다투게 될까요? 그것의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거절감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거절감은 열등감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논쟁할 때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최선의 것을 따라갑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의견에 대한 반대를 자기 자신에 대한 반대로 여깁니다. 그 사람의 내 생각과 의견을 반대한 것뿐인데 저 사람이 나를 반대하고 거절하고 무시했다고 자존심이 상해버립니다. 이렇게 거절감과 무시당한 느낌은 감정적인 논쟁으로 몰고가 결국 다툼까지 벌어집니다.
허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떨 때 허영이 나타나는가 보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원해서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포장합니다. 돈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데 잘 아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여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허영은 자신을 공동체로부터 점점 더 고립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본모습이 탈로날까봐 진정한 교제의 자리로 나오지 못합니다. 또한 교회일을 할 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선언을 하여 결국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렇다면 교회일을 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두 가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것
겸손
겸손은 사랑과 더불어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 반대는 교만입니다. 성경은 인간 죄의 근본을 교만, 즉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 선와 악에 대한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습니다. 반면 겸손은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임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큰 죄인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겸손은 능력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능력이 없으면 겸손할 수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을 능력 있는 사람이, 예를 들어 학력도 높고 돈도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것으로 인식해서입니다.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있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큰 죄인이고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까 겸손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게 됩니다. 왜 사람이 권력이 있고 돈이 많아지면 겸손해지지 못하고 거만해 질까요? 그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 자기까지 올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것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그 시대, 그 장소, 그 환경, 그리고, 그때 만났던 사람들의 도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가? “내 노력, 지혜, 경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구나” 깨닫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없는 자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이고, 실패한 자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기
두 번째는 하나됨의 실천은 각각 자기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의 본성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의 유익의 따라 움직입니다. 어떤 것을 할 때 나에게 얼만큼의 유익이 되는가에 대한 손익을 계산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위해 자신의 유익과 권리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본다는 것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희생할 때만이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명절에 어머니들의 헌신으로 온 가족들이 즐거움을 누립니다. 누군가의 헌신이 있는 곳에 편안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세워가야 할 교회가 바로 이러한 하나됨의 원리에 충실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럴 때 바울이 나의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쁜우리교회를 보시면서 기쁨이 충만해 지시도록 우리안에 하나됨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길 기도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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