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08-01 07:34

빌립보서 강해 11. 하나됨의 모델_ 그리스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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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11/ 하나됨의 모델 그리스도/ 2015. 6. 7

 

빌립보서 2:5-8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강해 11번째 시간으로 하나됨의 모델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나누겠습니다.
빌립보서는 계속해서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될 때만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악한 권세와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고 또한 험악한 고난의 삶 가운데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단의 전략중 대표적인 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려 성도들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위기는 대부분 분열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 서로를 대적하고 싸웁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바울파, 바올로파, 게바파를 만들어 분열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타락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계속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빼앗아 갑니다. 저는 교회의 분열을 두 번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단이 교활하게 성도의 인격과 이성을 타락시키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찬양이 울려 퍼지던 곳에 고함과 야유와 폭력이 난무하였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기쁨과 아픔을 나누었던 성도들이 분열되어 서로를 헐뜯고 험담하였습니다. 거리에서 환한 웃음으로 만났던 교우들이 다른편이라는 이유로 싸늘하게 지나쳐 갑니다. 

제가 처음 겪었던 교회의 분열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렇게 친했던 교회 친구들이 부모님들이 다른 편 이라는 이유로 만나지 않게 됩니다. 부목사로 사역했던 교회는 제가 사임 후 얼마 안되어 목사를 지지했던 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분리되었습니다. 그 과정가운데 서로가 받았던 상처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때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었던 모습은 지극히 사단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사단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기쁜우리교회를 시작하면서 빌립보서를 통해 주시는 하나됨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저 듣기 좋은 설교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교회를 통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다툼과 허영은 자기중심의 죄에서 나옵니다. 인정받기 원하는 욕구, 인격적인 미성숙함, 열등감에 기초를 둔 자존심 등, 이러한 연약함이 다툼과 허영의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공동체의 유익에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함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죄인이며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각각 자기일을 돌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 그리고 형제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노력을 그것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가지의 하나됨의 실천이 교회에 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사랑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교회의 하나됨의 실천이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도 실제로 교회의 구역이나 목장 셀그룹 내에서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평소에는 모두가 좋습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문제 앞에서도 마음이 나뉘고 상처 입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상대방에게 겸손을 요구하지만 실제로 자신은 그렇지 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과연 내가 어디까지 헌신하고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됨을 실천할 때 과연 어느 수준까지 낮아져야 할까요? 어떤 모습이 과연 진정한 겸손이며 헌신일까요?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겸손의 모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고 천국에 가서도 끊임없이 지향해야할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느 수준까지 낮아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만큼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수준가지 헌신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요한일서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데살로니가전서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무슨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신앙이 좋은 어떤 분이 모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생활의 모델입니다.
마태복음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요한복음13:14-15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놀랍고 위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녀들에게 “너는 이 다음에 커서 이순신처럼 훌륭한 군인이 되어야 한다” 또는 “세종대왕처럼 훌륭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에 대한 부모의 기대와 바램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의 수준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인간의 가치와 그에 대한 기대의 수준을 이처럼 높게 제시한 사람이 있습니까?
요한일서 3:2-
3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앞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게 가게 되면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이 땅의 현실의 삶에서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본받아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인데 6-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정교하고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서 신학자들은 바울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선포인데 바울이 이곳에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받아야 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함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본체’는 원어로 ‘모르페’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내는 틀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사용된 곳을 보면 ‘형상’ 또는 ‘형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롬8:29, 고후3:18, 갈라디아서 4:19). 예를 들어 우리 몸은 ‘나’라는 본질을 담고 있는 틀입니다. ‘나’라는 본질을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인격과 영혼을 포함할 것입니다. 심지형이 누구인가 했을 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심지형의 영혼 그리고 심지형이라는 인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형 영혼과 인격은 오감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인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형상 또는 형태로서 나타날 때 인식이 됩니다. 따라서 본질은 반드시 그것을 담아내는 틀이 필요합니다. 심지형의 영혼과 인격의 형상은 제 얼굴과 몸입니다. 그리고 저의 몸은 영혼과 인격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저의 몸을 통해서 인식합니다. 그렇다고 제 몸이 저의 본질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저는 심지형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 몸 안에 보이지 않지만 저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본질은 반드시 저의 몸을 통해서만이 인식됩니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형의 본질은 심지형의 몸이 있을 때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죽음이후에 우리의 존재가 부활을 육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죽음 이후에 떠돌아다니는 영혼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것이 지금은 죄로 말미암아 썩어질 육신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피조물이 인지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초월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본체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나타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알도록 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형태로서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동등한 지혜와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여기서 ‘비웠다’는 단어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의 본질을 스스로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 간혹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자신의 신성을 비웠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을 비워버린 철저한 인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신성이 없이 인성만 소유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성육신 때 신성의 존재가 인간과 같이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가난한 처지에 참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6:53절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리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즉 예수님은 신성을 온전히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스스로 제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능해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돌을 떡이 되게 하실 수도 있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의 수종을 받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침을 뱉고 모욕하는 자들을 하늘 천사를 불러 멸하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없기에 철저히 인간으로서 그 모든 고난과 수욕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겸손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비우심의 첫 번째가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입으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입으심으로 종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종의 존재방식이 되었습니다.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종인데, 피조물을 입으심으로 창조주가 종이 되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입고 신적 품성들을 제약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으로서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육신을 통하여 영원하신 분이 시간 내로 들어오시고 시간에 제약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어떤 것을 포기하셨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부요하심을 포기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변변한 집도 없었고 화려한 옷도 입지 않으셨고, 맛있는 음식도 드시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8:20). 저녁이면 집에 가야 되지만 피곤한 몸을 누일 곳도 없이 산으로 들판으로 가셔서 쉬셔야만 했습니다. 그 피곤이 어떠했으면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배를 타고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2)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기도하시기를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4-5)”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셨을 때 아버지와 누리셨던 하늘의 영광을 늘 사모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셔야 했던 예수님은 침 뱉음을 당하시고 따귀를 맞으셨으며 알몸을 드려내는 치욕스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당시 가장 혐오스러운 죽음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3)예수님은 성자의 권위를 포기하셨습니다.
히브리서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요한복음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성자의 권위를 포기하시고 종이 되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무능하셔서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자기를 비우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자기를 비우심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신성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포기하시고 인성이 만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다 겪으셨습니다. 피곤, 배고픔, 외로움, 수치와 핍박, 그리고 사람들로 부터의 배척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제자들은 전혀 돕지 못했습니다. 혼자서 그 무거운 시험과 짐을 감당하셨습니다. 가야바 법정에서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을 때도 오직 홀로 서서 자기를 증거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앞에서 아무도 예수님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로움의 극치는 십자가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고, 따르던 무리도 흩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은 홀로셨습니다. 뼈가 부서지고 깨어지며 살이 찢어지고 떨어져 나가며, 피가 쏟아져 심장이 터지는 것 같고, 목이 말라 숨이 막히는 중에도 제자들과 친구들의 배반,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조롱과 저주를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최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위로나 음성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사 십자가에 죽으심 겸손과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비움이셨고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를 능가합니다. 우리가 얼마큼 겸손해야 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낮아지심 같이 해야 합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사 우리를 섬기셨던 예수님, 그분께서 죽이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14-15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당시 제자들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자신의 발을 씻기셨던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구나! 그 분께서 섬기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낮아지시되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섬기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겠습니까?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그 분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낮아지고 겸손해야 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대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오른편 뺨을 친자에게 왼뺨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또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결론적인 말씀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이 땅에서 어떻게 가능하나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천국의 윤리적 삶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우리의 뺨을 때리는 사람도 없고, 원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실천하라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가 이 땅에서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사 이렇게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지고 겸손하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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