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08-01 08:00

빌립보서 강해 14. 원망하지 말라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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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14/ 원망하지 말라/ 2015. 7. 5

빌립보서 2:14-15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립보서 강해 열네 번째 시간으로 “원망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여 실천적 삶이 따르지 않는 책임 없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서 실패하더라고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구원을 이루어갈수 있는 이유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십니다. 그 소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 소원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뒤이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이루는 것과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는 것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여정 가운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원망과 시비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모든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겪게 되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세 가지 시제로 표현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과거, 롬5:1,8:1). 그리고 이 구원은 우리의 삶속에서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현재, 빌2:12), 그리고 마침내는 완성될 것입니다(미래, 살전1:10). 그래서 현재의 우리의 삶은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기쁘신 소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은 이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들이 있을 것입니다. 각자가 나름대로 세운 목표와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 주어진 우리의 인생은 그 소원을 이루어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고 살아가는 여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길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많은 일들이 내가 마음에 원하는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결단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고자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 원망이고 그것이 표현되어질 때 시비가 되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망은 내적이고 마음과 감정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시비는 외적이고 말과 행동의 영역입니다. 이러한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고 뜻하지 않는 어려움들이 닥치더라고 원망과 시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원망과 시비는 결국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해서 또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원망하고 시비하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망과 시비는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망과 시비의 시조는 아담입니다. 그는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한 이후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사실, 자신의 죄의 원인을 여자에게 돌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라고 말함으로 여자를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 볼 때 원망은 자기중심적인 죄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의 대표적 사례가 있다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은혜를 베푸시지만 금세 잊고 또다시 원망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을 목전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모두가 그 땅을 악평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민수기 14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결국 그들은 정탐한 날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여 40년을 광야생활을 하게 되고, 그들이 원망했던 말대로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그런데 온 회중이 이렇게 원망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의 원망(출14장)
처음 그들의 원망은 홍해 앞에서 시작됩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사가 병거를 타고 뒤쫓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14:11)” 처음 그들의 원망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듯 보여집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홍해가 갈라지는 능력을 보여주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리고 15장에 가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큰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라에서의 원망(출15장)
그리고 3일후 그들은 마라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물이 없어 또 다시 원망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고 그들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질병으로 보호하시는 치료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물샘 열두개가 있고 종려나무 70그루가 있는 엘림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원망(출16)
출애굽기 16장에 가면 엘림을 떠나 출애굽한지 2개월하고 15일이 지났을 때 그들을 광야에서 또 다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들의 원망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양식으로 인해 원망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를 통해 먹이셨습니다.
물이 없어 원망(출17)

출애굽기 17장에 가면 그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또 다시 물이 없어 원망합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17:3)”
이때도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로 호렙산의 반석을 치게 하시고 그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심으로 목마름을 해결하십니다.
이렇게 출애굽의 여정속에서 반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들이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에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또 다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행하시겠다고(민14:28)”하시고 그들을 심판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심판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106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편 106편
24.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25.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26.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27.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고전10장에는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원망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그 결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판을 받습니까? 우리가 원망한대로, 하나님 귀에 들린대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이렇게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의 기쁨 가운데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때는 열정도 불타올랐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열정도 식어지고 삶의 문제가 닥치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기도 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갈등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그 어려움 앞에서 우리의 반응이 우리의 신앙의 수순입니다. 만일 원망하게 되면 - 그 원망이 환경을 탓하든지 사람을 향하는 것이든지 -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고 그 근원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가 깨어진 것입니다. 만일 원망을 넘어서 시비로 표현되어질 때 그것은 자신만 영적으로 병든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만일 내 모습 가운데 원망과 시비가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관계가 멀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뜻대로 이루어 집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현재는 내가 스스로 결정한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원망은 내가 선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환경과 사람에게 돌리는 아담적 죄를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은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원망을 문밖에서 심판주가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들이 방에서 원망하는 것을 부모님이 문에 귀를 대로 듣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할 목적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목적

하나님의 자녀
첫 번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너희가 원망과 시비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떤 존재인가 하면 흠이 없고 순전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용어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는 반드시 흠이 없는 것으로 드렸습니다(민6:14, 민19:2). 베드로 사도는 벧후 3:14에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살아 있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 몸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어떤 상처가 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롬12:2절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즉 우리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물은 반드시 구별된 것이기 때문에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되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듯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제물로서 흠이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또한 “순전하다”는 것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죄악과 섞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순결한 신부로 표현합니다(계14:4).
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어그러지다”는 굽었다는 것입니다. 굽었다는 것은 곧은 것을 전제합니다. 곧은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대는 곧은 하나님의 뜻이 굽혔다는 것입니다. “거스르다”는 것은 ‘뒤집어진, 전도된’이라는 뜻입니다. 진리가 뒤집혀 거짓이 되고 거짓이 뒤집혀 진리가 된 것입니다. 선과 악이 전도된 것입니다. 바로 이 세대의 특징이 어그러지고 거스린 것입니다.
2015년 6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동성 커플은 미국 어느 곳에서나 결혼할 권리를 갖는다는 동성애 합법화를 결정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9명 가운데 찬성 5명, 반대 4명으로 동성결혼이 합헌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결에 따라 현재까지 36개 주에서만 허용됐던 동성결혼이 모든 주에서 허용됩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의 신앙위에 세워진 국가입니다. 지금도 대통령 취임 때는 성경위에 손을 언고 선서를 합니다. 그러한 그들이 창조의 질서를 어그러뜨리고 거스르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의 동성애자들의 축제인 퀴어축제로 시끄럽습니다. 그들은 엉덩이가 다 보이는 옷차림새로 퍼레이드를 벌이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도 합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마치 인권을 무시하고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자들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 개신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의 특징적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굽게 하고 전복시킵니다. 이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둠의 영역에 속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흠이 없고 순전합니다. 또한 태양이나 별처럼 빛을 비춥니다. 만일 어둠 가운데 빛이 없다면 어둠은 어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둠이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가운데 있으면 세상은 불편해 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결국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이 인식되고 자신들의 죄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입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들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들이 원망과 시비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것입니다. 너희의 존재가 이렇게 가치 있고 중요하기 때문에 원망과 시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더욱 우리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사명
두 번째 이유는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에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며...”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자들이 원망과 시비를 한다면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수직하는 단어가 “생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증거하는 말씀이 생명을 주는 것이고 생명에 대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 여기서 “밝히다”라는 것은 꽉 붙잡아서 내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횃불을 꽉 붙잡고 내미는 것을 연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말씀을 밝히다”라는 것은 생명을 주고 생명에 대한 말씀을 꽉 붙잡고 내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말씀이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달음질하고 수고하는데 그것이 헛된 수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열정보다 중요한 것이 바른 것에 대한 열정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그 방향성이 잘못된 경우도 많고, 엄청난 열정과 노력의 댓가가 헛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열심히 달려갔는데 잘못된 목적지로 갔다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가 가는 길이 바른 목적지로 가는 길인지, 바른 방법으로 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그 지표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중요한 본질이 있다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먼저는 생명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은 말씀이 반드시 생명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신비한 환상이나 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는 나의 지혜나 경험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생명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내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고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인정과 칭찬을 받을 지라고 그가 생명의 말씀을 밝히지 못했다면 그 달음질이 헛되고 그 수고도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방향, 수고의 과정은 결국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원망하지 말고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께서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시고 또한 생명의 말씀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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