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로서의 삶/ 빌립보서 강해 15/ 2015. 7.12
빌립보서 2:17-18
17.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립보서 강해 15번째 시간으로 “제물로서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가는 삶 속에서 “원망과 시비하지 말라”는 내용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목적과 이유를 두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17절에서부터 30절까지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세 명의 인물을 모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오늘은 바울에 대하여 살펴보고 다음주에는 디모데 그리고 이후에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번 뿐이고 호흡하며 살아갈 시간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80, 90년이 평균수명이라지만, 그 중에 명쾌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제한적인 삶의 시간속에서 최대한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물질이 주는 풍요와 안락함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오는 인정과 평가를 통해 만족감과 우월감을 느끼고 거기서부터 오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이것을 세속적이라고 치부하면서 행복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수행과 자기절제를 통해 내면적인 고요함속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속적이든 정신적이든 인간이 추구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그 만족과 행복은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 좋은 집을 사고 살아보지만 얼마 후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만족을 주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인기와 명예를 얻어 보지만 그 자리에 가보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삶의 자리에 서본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돕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얻은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과격한 방식을 통해 세상의 헛됨을 증거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살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늘 한국에서의 삶에 싫증을 느낍니다. 저는 외국에서 살아보았기에 이민생활이 그 친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 자리에 서보지 않았기에 여전히 그것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어 보거나 그토록 오르고 싶어 하는 자리에 서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공간이 있습니다. 삶을 진진하게 성찰해 본 사람은 인생의 허무함과 무의미함을 깨닫습니다. 향락과 쾌락으로 밀려오는 허무함을 밀쳐 내보지만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사는 것이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인생을 가치 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함을 얻듯이 인간은 창조주의 뜻 안에 있을 때 비로서 참된 행복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창조주의 뜻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뜻을 알고 행하는 것 만이 인생을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고 가치 있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가치 있는 삶을 살았고 그 안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었던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천국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완전한 행복을 이 땅에서부터 맛보며 그 나라를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하며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비록 그의 삶의 대부분이 고난과 역경이었지만 한번도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않고 늘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배워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고들에게 권면하기를 너희가 서로 겸손히 섬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2장부터 시작된 내용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겸손히 서로를 섬김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말합니다. 그 내용이 2장 5-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삶에 있어서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섬김의 본이 되었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갈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삶을 전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전제라는 것은 짐승의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로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붇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연기와 함께 고기의 향이 하늘로 올라가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전제의 제사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삶을 전제로 표현한 이유는 삶에 대한 인식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서의 삶이 바울이 인식했던 삶에 대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인 화목제물로 드려진 것처럼, 바울이 추구했던 삶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 말합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가 걸어갔던 그 길로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 그리고 희생과 헌신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면서 우리에게도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받아야할 바울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서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제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입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의 편지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전반부는 교리적인 내용이고 후반부는 실천적인 내용입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먼저 구원이 무엇인지 교리적인 부분을 1-11장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나서 12장부터는,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1-2절은 12장부터 15장까지 내용을 포괄적으로 서술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을 축약해 놓은 내용인 것입니다.
여기 보면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은 제물로서의 삶이며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예배로서의 삶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시간 잠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15절에 바울은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라고 했을 때 이것은 제사용어인데 그것은 성도들의 존재가 제물로서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을 제물로서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족하신 분이십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사 창조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따라 피조물이 창조될 때마다 그것을 보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고 우주만물은 찬양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탁월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과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어갈 때만이 진정한 자기됨의 정체성과 가치를 발견합니다. 왜나햐면 어떠한 것에 가치는 그 목적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기 있는 볼펜이 글을 쓸 수 없는 것이라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기있는 핸드폰이 전화를 걸거나 받을 수 없고, 어떤 정보도 검색할 수 없다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의 가치는 목적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창조된 인간이 그 목적대로 쓰임 받지 못하면 가치없는 인생이 됩니다.
아담의 범죄이후에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힘과 권력을 얻어 타인들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적이 됩니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세워 타인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지만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목적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배하는 자리에 서기 전까지 우리의 인생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들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구별되어다’라는 의미로 설명하지만 사실 그것을 넘어서는 표현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어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앞에 섰을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사6:3)”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구별되었다는 것으로만 표현하기는 아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안에 거한다는 것이고 또한 세상과는 구별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에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로서 거룩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안에 거하게 되었고 또한 세상과는 구별된 존재로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모습이 창조 때 하나님의 목적이었던 예배하는 존재로서의 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삶이 가치 있어 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발견한 자들은 세상의 가치가 헛됨을 알 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거듭나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부러울 게 없습니다. 삶이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늘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만족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골로새서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데살로니가전서 3:7
“8.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9.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은 궁핍과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삶이었기에 그 목적을 이루면서 기쁨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환경을 탓하거나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17.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관제로서의 제사임을 말합니다. 여기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라는 것은” 빌립보 성고들이 믿음가운데 드려진 헌금과 그들의 섬김을 말합니다. 헌금을 “제물”이라고 표현하고, “섬김”이라는 단어는 개인적인 섬김이 아니라 원어의 의미는 공동체가 드리는 제사로서의 봉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헌금과 섬김 또한 제사용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들의 모든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예배적 삶에 자신이 전제로 드려진다는 것은 빌립보 성도를 향한 희생과 섬김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며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관제로서의 삶이고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기쁨이라는 단어가 벌써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바울은 인생의 참된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참된 삶의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제물로서의 삶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2절에서 이렇게 제물로서 드려지는 영적예배자의 삶의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표현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절대적 가치와 진리를 부정합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고 진리를 해체시킵니다. 여기서의 미덕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절대적 진리를 누군가 주장하면 그는 외골수요 포용력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얼마전 tv프로그램에서 동성애가 죄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독교 신학자 두 분이 나와서 말씀하시는데 동성애를 죄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반대의 목소리를 몹시 의식하는 듯 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타협하게 되면 세상은 급속도로 혼탁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또 어떻습니다. 물질 만능시대입니다. 모든 가치는 돈으로 측정되고 환산됩니다. 사람의 가치는 얼마큼의 생산능력이 있는가로 판단되어 집니다. 따라서 생산성이 없는 노인들은 괄시받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그 존재의 근원입니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이 바뀌지 않는 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의 말과 행동을 근사하게 하여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외식이고 가식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새롭게 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은 악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은 갈등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온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꿈과 비전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어떤 길을 가질 원하실까?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실까? 어느 자리에 있기를 원하실까? 어떤 말을 하길 원하실까? 하루라는 시간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신령한 목사님이나 권사님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속에서 선명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예배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제물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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